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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스키 함께 즐기며 30년 붙어다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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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한남동 하얏트호텔 커피숍. 30년 가까이 의기투합해온 정구현(鄭求鉉)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와 장정훈 (張正訓) 존슨앤드존슨 부회장(아시아.태평양 담당)이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날 만남은 존슨앤드존슨 아.태 지역본부가 있는 홍콩에 사는 張부회장이 서울을 찾았다가 "친구를 못 보고 떠날 수 없다"며 연락해 이뤄졌다.

"鄭교수는 내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친구예요. 아마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을 누군가에게 맨 처음 털어놓는다면 그가 바로 鄭교수일 거예요. 너무나도 마음 든든하고 편안한 친구가 이렇게 내 옆에 있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지요."(張부회장)

"학자와 경영자로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기업에 보다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는 게 중요하다는 데 의견이 항상 일치했죠. 또 살아오면서 정직과 윤리경영을 중시해 왔고요. 그래서 그런지 그렇게 많이 만나면서도 헤어질 때 한번도 마음이 께름칙하지 않았어요."(鄭교수)

張부회장은 한국인로서는 아주 드물게 다국적 기업의 간판급 경영자로 일하고 있고, 鄭교수 또한 경영학계에서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학자로 손꼽힌다.

고향도, 출신 학교도 같지 않은 56세 동갑내기인 이들이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76년 여름. 당시 미국 미시간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鄭교수는 논문자료 수집을 위해 한국을 찾았고, 張부회장은 미시간대 경영학석사(MBA) 과정 입학허가서를 받고 출국을 앞둔 상태였다.

그때 鄭교수의 매형이 두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매형은 당시 영진약품에 근무했던 張부회장의 직장 상사였다. 부하 직원의 유학생활에 鄭교수가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鄭교수는 그해 8월 디트로이트공항에 도착한 張부회장을 따뜻하게 맞이했고, 자신의 집에서 며칠간 묵도록 하는 등 張부회장의 유학생활에 적잖은 도움을 줬다.

鄭교수도 호텔 음식점.중국식당 등에서 웨이터로 일하며 학비를 벌어야 할 만큼 힘든 유학생활을 했지만 거의 빈 손으로 유학길에 올랐던 張부회장의 고생은 특히 심했다고 한다.

"한 학기를 마치니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안 남았어요. 뭘 몰랐으니까 겁 없이 유학간 것이죠. 그래서 휴학하고 6개월간 주유소에 취직해 학비를 벌었어요. 그때 주유소 사장 집의 허름한 방을 빌려 지냈죠. 세번째 학기부턴 대학 교무과에 매일 찾아가 '졸업하면 미국에 많은 봉사를 하겠다'고 사정해 장학금.학자금 등을 타 학교를 마쳤죠."(張부회장)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鄭교수는 張부회장을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평했다. 제주도 북제주군이 고향인 張부회장은 어렸을 때 꿈이 은행원이었다고 한다.

"제주상고 1학년 때 서울에 가고자 배를 타고 도착한 목포에서 처음으로 기차를 봤습니다. '김밥' 같이 생긴 기차가 어찌나 신기하던지요. 또 서울 외삼촌 집에서 구경한 TV도 그랬고요.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이 대학 얘기를 하길래 '나도 대학이란 데를 가봐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때 서울에 가지 않았다면 평생 평범한 은행원으로 살았을 겁니다."(張부회장)

이들이 더욱 가까워진 것은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79년께. 그때부턴 취미가 둘을 돈독하게 이어줬다. 두 사람의 가족들은 겨울이 되면 주말마다 강원도 용평으로 스키를 타러 갔다. 돈을 아끼느라고 유스호스텔에서 함께 묵고, 요리한 음식을 나눠먹었다. 두 사람은 한때 스킨스쿠버에도 빠졌다. 張부회장은 "鄭교수가 스킨스쿠버 장비를 걸쳤을 때는 교수님의 품위가 전혀 없다"고 껄껄 웃었다.

경영에 대한 관심도 우정의 촉매제였다. 리더십.마케팅 등 기업경영과 관련된 주제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끊임없이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鄭교수는 20여년간 연세대 경영대학원과 최고경영자 과정에 張부회장을 강사로 초빙해 학생들에게 생생한 현장경험을 들려주도록 했다. 이들은 또 공동으로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우리에게 차이가 하나 있기는 하죠. 이 사람은 엄청난 부자이고, 난 가난뱅이에요. 아마 수입이 10배는 차이가 날 거요. 10배가 뭐야! 수십배겠지(웃음). 그런데 또 친구 자랑이지만 이 사람은 자신보다 밑에 있는 직원들 보너스 많이 주는 데 관심이 참 많아요."(鄭교수)

하재식 기자 <angelha@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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