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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류·직류 전쟁에 사형수까지 동원한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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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표준 선점에 달린 미래

DC(직류) 방식을 고집한 에디슨은 표준을 장악하기 위해 웨스팅하우스의 AC(교류) 방식이 위험하다는 점을 집중 홍보했다. 1890년 8월 6일 미국 뉴욕 오번 교도소에서 에디슨이 고안하고 그의 추종자가 만든 AC 방식의 전기의자로 살인범 윌리엄 케믈러의 사형을 집행했다. 사진은 당시 장면을 묘사한 삽화.

DC(직류) 방식을 고집한 에디슨은 표준을 장악하기 위해 웨스팅하우스의 AC(교류) 방식이 위험하다는 점을 집중 홍보했다. 1890년 8월 6일 미국 뉴욕 오번 교도소에서 에디슨이 고안하고 그의 추종자가 만든 AC 방식의 전기의자로 살인범 윌리엄 케믈러의 사형을 집행했다. 사진은 당시 장면을 묘사한 삽화.

세계 첫 표준전쟁이라고 볼 수 있는 사례는 철도의 두 레일의 간격을 의미하는 ‘표준궤’를 둘러싼 대결이다. 가장 먼저 철도를 발명하고 사업을 시작한 영국의 조지 스티븐슨은 탄광에서 석탄을 나를 때 쓰던 마차의 표준을 채용해 두 레일의 간격을 1.42m로 잡았다. 이와 달리 당대 최고의 엔지니어로 불린 이삼바드 킹덤 브루넬은 열차가 좁은 간격의 레일 위로 달리는 게 비효율적이라고 보고 2.14m의 표준을 주장했다. 두 사람은 자신의 표준을 적용해 철도를 건설했다. 영국 정부는 1845년 판정을 내렸다. 더 긴 철도를 깔았던 스티븐슨의 손을 들어줬다.

19세기 말 전기 등장 후 AC·DC 격돌 #"고압 송전 가능한 AC 방식은 위험” #에디슨, 사형 집행 전기의자로 로비 #VHS·베타맥스는‘VCR 포맷 전쟁’ #기선 장악 위해 적과의 동맹 수두룩

19세기 말 전기가 등장한 후 AC(교류)·DC(직류) 방식 표준경쟁도 치열했다. 발전·배전 시스템을 처음 설계한 토머스 에디슨은 DC를 사용했고, 후발 주자인 웨스팅하우스는 고압 송전이 가능한 AC 방식을 밀었다.

에디슨은 DC를 표준으로 만들기 위해 고압으로 전송되는 AC의 위험성을 집중 홍보했다. 심지어 고압 AC로 전기의자를 만들어 사형을 집행하자고 로비전도 벌였다. 실제로 에디슨의 추종자가 만든 전기의자로 사형을 집행했는데 교수형보다 훨씬 잔인하다는 비판만 받았다. 그러는 사이 AC 사용자가 늘어 현재의 전력 송전·배전의 표준으로 굳어졌다. 특히 니콜라 테슬라 등이 AC 모터를 발명하고, 삼상 AC 전류와 같은 관련 신기술이 나온 게 결정타가 됐다.

표준전쟁에서 패한 DC는 생각보다 오래 존속했다. 고압으로 전송된 AC를 감압한 후 DC로 바꿔주는 ‘로터리 컨버터’ 같은 기술 덕에 이미 DC를 사용하던 지역에서 배전망이나 전기제품을 AC용으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쓸 수 있었다. 경제사학자 폴 데이비드는 이처럼 경쟁하는 두 기술을 이어주는 로터리 컨버터 같은 기술을 ‘게이트웨이 기술’이라고 불렀다. 그는 표준전쟁에서 경쟁하던 기술 중 하나가 급작스럽게 사라지기보다는 게이트웨이 기술의 등장으로 생각보다 오래 살아남는다고 주장했다.

물론 게이트웨이 기술이 있더라도 시장경제에서는 표준을 선점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재 일반적으로 쓰는 ‘쿼티 키보드’는 표준 선점의 위력을 보여준다. 쿼티 키보드는 ‘바’가 있는 타자기에 적합하게 디자인된 제품이다. 그런데 이 디자인은 바를 사용하지 않는 컴퓨터에서도 계속 쓰인다. 더 편리한 자판이 나왔지만 이미 쿼티 자판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다른 자판으로 바꾸길 꺼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시장이 열리기 시작할 때 표준을 선점하면 나중에 시장이 커지고 기술이 달라져도 선점효과가 지속되는 현상을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 또는 ‘네트워크 외부효과(network externalities)’라고 한다.

다른 표준의 선점효과를 봉쇄하려면 다양한 전략이 필요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에서는 방송국인 CBS와 흑백 TV 제조사 RCA가 컬러 TV의 표준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다. 미국연방통신위원회(FCC)는 1950년 CBS의 컬러 TV를 표준으로 채택했다. RCA는 이를 뒤집기 위해 흑백 TV를 싸게 공급하기 시작했다. TV가 없던 소비자들은 이 기회에 흑백 TV를 장만했다. 이들은 굳이 CBS의 컬러 방송을 보기 위해 비싼 컬러 TV를 구입하려 하지 않았다. CBS가 컬러 방송을 시작했을 때 컬러 TV를 소유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결국 FCC는 1953년 기존 결정을 번복하고 RCA의 기술을 컬러 TV의 표준으로 승인했다.

1970~80년대 VCR 표준전쟁을 벌인 소니 진영의 베타맥스.

1970~80년대 VCR 표준전쟁을 벌인 소니 진영의 베타맥스.

더 극적인 표준전쟁은 ‘포맷 전쟁’이라 불리는 VCR의 사례다. VCR은 소니가 1975년 베타맥스를 출시하면서 상용화됐다. 이에 대항했던 JVC는 1976년 VHS라는 기술을 시장에 내놨다. 화질은 베타맥스가 VHS보다 우수했다. 초기에는 기술력이 앞선 베타맥스가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1981년 시장점유율은 베타맥스 25%, VHS 75%로 역전됐다. 이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지만, 몇몇 전문가는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커지던 포르노 산업에 주목한다. 소니 진영은 이들과 손을 잡지 않은 반면 JVC동맹은 자신들의 기술을 포르노 영화의 표준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비디오는 포르노를 즐기는 데 적합한 매체였고, VHS로 제작된 포르노 테이프는 미국 중산층 가정을 파고들었다. 뜻밖에 포르노라는 ‘콘텐트’가 표준의 운명을 좌우한 셈이다.

JVC 동맹의 VHS.

JVC 동맹의 VHS.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비슷한 표준전쟁이 다시 벌어졌다. DVD의 뒤를 잇는 광저장장치가 나오면서다. 소니의 블루레이와 도시바의 HD-DVD가 격돌했다. 당시 소니는 베타맥스 때와 마찬가지로 블루레이 표준에 포르노 콘텐트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발표했지만 예전의 실패를 교훈 삼아 일본 외의 지역에서는 포르노를 슬쩍 허용했다. 이어 2008년 세계 최대 영화사인 워너 브라더스가 블루레이 표준만을 채택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소니가 관련 시장을 장악했다.

홍성욱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홍성욱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역사적 사례를 보면 어떤 기술이 우월하다고 무조건 표준으로 안착하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이 사용한다고 표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처음에 표준을 선점했어도 표준에 도전하는 경쟁 기술과 싸워서 이겨야 하고, 새로운 기술 개발로 사용자를 자신의 네트워크에 묶어둬야 한다. 특히 적의 의중부터 간파하고, 동맹을 맺어 아군의 힘을 키우고, 적절한 무기를 써서 적을 물리치는 이치는 ‘표준전쟁’에서도 마찬가지다.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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