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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폐문제 사실 확인 필요" 부시 대북정책 제동 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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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국 정부가 아직 그런 입장이 아니라 현재는 이견이 없다는 말을 덧붙이기는 했다.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회견 직후 기자들과 만난 이병완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금 양국 간에 아무런 이견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 화법"이라고 주장했다.

노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처음이 아니다. 2004년 11월 LA를 찾은 노 대통령은 보수 성향인 미 국제문제협의회(WAC) 연설을 통해 "북한에 대한 무력사용.봉쇄.붕괴 전략에 동의할 수 없다"는 3불(不) 입장을 표명했었다.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직후였다.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을 중심으로 6자 회담 무용론, 대북 강경론이 거론되던 시점이었다. 이를 잠재우기 위한 계획된 발언이었다.

25일 회견에서 그가 LA에 이어 두 번째로 미국 내 강경파에 대해 경고등을 켠 것은 시점과 의미가 미묘하다. LA 발언 당시에는 미 정부가 아닌 조야에서 강경론이 분출되던 때였다. 그러나 최근 상황은 전혀 다른 국면이다. 미 행정부가 직접 위폐 문제를 지렛대로 거센 대북 압박에 돌입한 상태다. 주한 미 대사가 북한을 '범죄정권'이라며 성토하고 있다. 6자회담도 북한 위폐 논란과 대북 금융제재로 교착 상태여서 정부 외교안보팀이 답답해 하는 분위기다.

이 때문에 북한 압박이라는 강경론이 미 행정부의 해법으로 채택될 경우 거부하겠다는 단호한 메시지를 노 대통령이 던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노 대통령의 이날 표정에도 위기감이 배어났다. 강력한 예방주사를 놓겠다는 의도로 보였다. 한 정부 고위 관계자는 최근 기자와 만나 "우리 정보로는 북한이 정부 차원에서 위폐 제작에 조직적으로 개입하거나 지시했다는 정황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거 외교관들이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할 때 밑에서 위폐를 만든 게 아닐까라는 판단을 하고 있다"고 했다.

북한, 구체적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정부의 이런 기조는 대통령 회견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노 대통령은 "위조지폐와 관련해 북한의 어떤 불법행위가 있었는지, 그것이 핵문제 해결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사실확인과 이견 조율이 필요하다"고 했다. 미국의 공세적 압박과 달리 로 키(low key)의 신중한 입장을 택했다. 결국 남북 화해와 교류협력의 기조를 고수하겠다는 입장인 셈이다. "이만큼 성의를 표시하고 있으니 6자회담 성과를 위해 한발 양보해 달라"는 대북 메시지의 측면도 있다는 게 청와대 참모들의 설명이다.

이날 회견에도 불구하고 불씨가 더 커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국 내에서 위폐 문제로 인한 대북 강경 대응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는 심상치 않은 기류 때문이다. 미국 측의 입장 정리에 따라 한.미 간 균열이 생겨난다면 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자칫 우리 측 대응의 유연성을 축소하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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