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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투데이

우향우 미국, 좌향좌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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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9.11 테러 이후 행정부의 권한 확대를 강조해 왔다. 그 결과 부시 행정부는 '국가 안보'라는 명분 아래 영장 없이 미 국민을 도청했다. 부시 행정부가 테러 혐의자를 색출하기 위해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발부받아야 하는 절차를 생략한 것은 어느 정도 선을 넘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 정부는 이 영장 없는 도청은 '테러와의 전쟁' 맥락에서 실시되는 것으로 사법적 절차는 넘어갈 수 있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논란은 이달 열린 새뮤얼 얼리토 미 대법원장 지명자의 상원 청문회에서도 제기됐다. 공화당이 다수인 의회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상원 청문회 일정이 잡혔다. 최근 연방 지방법원에 정부의 도청과 관련된 소송 두 건이 제기돼 있다. 따라서 미 대법원이 조만간 도청을 둘러싼 부시 행정부의 행위를 사법적으로 판단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도청 스캔들과 포로에 대한 고문 등의 사례는 9.11 테러 이후 부시 행정부의 중심추가 국가 안보 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최근 미국인들이 이 균형점을 다시 왼쪽으로 밀어내고 있다. 변화의 작은 조짐으로 교통안전청이 지난해 국내 여행 제한을 완화한 것이나 워싱턴 지하철 역에 쓰레기통이 다시 등장한 것 등을 꼽을 수 있다.

반면 노무현 정부에서는 한국 사회의 중심추가 왼쪽으로 기울고 있다. 시민적 자유를 국가 안보에 우선시하는 것이다. 한국의 도청 스캔들에는 독재 시대는 물론 민주화 이후에도 국내 정치에서 독특한 역할을 했던 정보 기관이 연루돼 있다. 국가보안법 개정 등 논쟁은 과거 독재 정권 시대에 대한 강력한 반발을 보여준다. 국가 안보냐 시민적 자유냐의 문제에 대한 한국 사회의 중심추는 언젠가는 균형점을 찾게 될 것이다. 하지만 도.감청 사건은 입법부와 사법부에 의한 효과적인 견제를 받지 않는 강한 행정부의 위험을 상기시켜 준다.

노무현 정부가 행정.입법.사법부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에 독특한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다. 여당의 불법 선거자금에 대한 검찰 수사를 노 대통령이 묵인한 것은 3권분립 정신에 따라 행정부 수사라는 선례를 남긴 것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다.

노 대통령을 겨냥한 탄핵 발의와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국가권력이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유지한다는 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한 것으로 훌륭한 교훈이 됐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한국 사회가 큰 정치.사회적 비용을 치른 것도 사실이다. 행정부의 권한을 효과적으로 극대화시키는 한편 입법부와 사법부가 어떻게 기능할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한.미 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는 이처럼 미국의 중심추가 오른쪽으로 쏠린 반면 한국의 중심추는 왼쪽에 가 있는 상황에서 한.미동맹 관계를 어떻게 관리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로 인한 긍정적 측면 외에도 이 같은 부조화는 한.미동맹 관계의 핵심적인 단절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될 일시적인 이슈인가. 과거에는 국익과 안보 문제에 종속 변수였던 국내 정치와 이념문제가 어느덧 한.미동맹 관계를 좌우하는 핵심적인 요인으로 등장했다. 서울과 워싱턴의 현명한 대처를 기대한다.

스콧 스나이더 아시아 재단 선임 연구원

정리=박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