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신성식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고려대 정의장학금은 정의롭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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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신성식 기자 중앙일보 복지전문기자
신성식 논설위원 겸 복지전문기자

신성식
논설위원 겸 복지전문기자

10여 년 전 본지가 서울지역 기초수급자 420가구를 조사했더니 60%가 부모에게서 가난을 물려받은 걸로 나왔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고 ‘빈곤의 대물림’이 얼마나 줄었을까. 양극화가 심해진다니 대물림 정도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국민들도 비관적으로 본다. 중위소득 아래 가구의 34%만 ‘다음 세대에서 계층 이동할 것’이라고 본다. 교육의 계층 상승 기능이 많이 약해지긴 했어도 그래도 교육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

그렇지만 형편이 어려운 학생은 경쟁에서 뒤처진다. 고려대생 김모(22·여)씨 가정은 2006년 아버지가 숨지면서 기초수급자가 됐다. 사별로 인한 전형적인 빈곤층 추락이다. 김씨는 대학 입학 후 주중 과외 두 건, 주말 식당일로 생계비를 벌었다. 주당 15시간 일했다. 체력이 달려 공부하기가 힘들었다. 이 학교 학생 박홍빈(22·여)씨도 15년 전 기초수급자가 됐고 대학생이 돼 과외와 제과점 알바로 생계비를 충당했다.

이들에게 지난해부터 매달 생계비 30만원이 나온다. 학교 측이 성적우수 장학금을 없애고 기초수급자 ‘생계비 장학금’으로 돌렸다. ‘장학금=성적우수 장학금’이라는 고정관념을 깼다. 놀랍게도 2015년 1학기 고려대 성적우수 장학생 811명 중 저소득층(0~2분위)이 64명에 불과했다. 최상위 10분위가 462명, 8~9분위가 118명이었다. 상류층 자녀가 72%였다. 성적장학금은 선진국에도 별로 없다고 한다.

장학금을 개편하자 김씨는 알바 3개를 1개로 줄였다. 박씨는 과외 한 건을 없애 주당 8시간가량을 아꼈다. 두 사람은 남는 시간을 학과공부와 자격증 준비에 투자한다. 김씨는 교사의 꿈에, 박씨는 기자나 애니메이션 감독의 꿈에 좀 더 가까이 가고 있다. 김씨는 “교사가 되면 내 대에서 빈곤을 끊겠다”고 말한다. 박씨는 “줄어든 시간이 정말 귀하다”고 말한다. 현행 기초생보제는 자녀의 알바 소득을 가구소득으로 잡는다(알바 소득이 50만원이면 14만원). 이만큼 지원금을 깎는다. 알바를 줄이면 이런 일도 사라진다.

고려대 염재호 총장은 지난해 초 “양극화 해소에 대학이 기여하는 걸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기자는 박수를 쳤다. 그리고 1년이 지나 효과가 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치지 말고 차상위계층에게도 확대하는 방안을 고려했으면 좋겠다. 다른 대학들도 이번 기회에 한번 고려대의 사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리하면 공정한 출발선이 좀 더 늘 것이다. 고려대 새 장학제도 이름은 ‘정의장학금’이다. 이름 참 잘 지었다.

신성식 논설위원 겸 복지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