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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색채, 분방한 필선 ­… 번득이는 사유의 흔적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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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국내 비디오 아트 선구자 박현기. 브라운관 TV를 안고 있다

국내 비디오 아트 선구자 박현기. 브라운관 TV를 안고 있다

2일부터 서울 삼청로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박현기-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국내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꼽히는 작가 박현기(1942~2000)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자리다. 독특한 건 그 초점이 드로잉이라는 점이다. 재료도 독특하다. 1993~94년에 집중적으로 그려진 이들 드로잉은 당시 그가 새로이 접한 재료였던 오일스틱을 이용해 주로 한지에 그린 것이다. 돌과 돌 사이에 TV 모니터를 쌓아올린 그의 이름난 비디오 설치작품들처럼 동양과 서양, 새로운 것과 전통적인 것의 만남을 떠올리게 한다.

비디오 아티스트 박현기 드로잉전

전시장에 자리한 드로잉 작품은 강렬한 색채와 필선으로만 이뤄진 순수한 추상부터 그의 설치작품에 번득이는 사유의 흔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짐작하게 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몇몇 작품에는 돌과 TV 모니터를 탑처럼 쌓아올린 모습이 직접 등장하기도 하고, ‘物’ ‘心’ ‘MIND’ ‘SPIRIT’ ‘UTOPIA’ 같은 문자가 그의 단정한 필체로 거듭 등장하기도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뜻하는 ‘DIALECT MATERIALISM’도 눈에 띄어 이채를 띤다.

1993∼1994년작 ‘무제’. 한지에 오일스틱으로 그린 드로잉이다. 79×104?.

1993∼1994년작 ‘무제’. 한지에 오일스틱으로 그린 드로잉이다. 79×104?.

미술평론가 강태희씨는 “이 작업들은 분방한 필선과 세련된 색채로 문자와 이미지들을 구성한 역작으로 단순한 작업 드로잉의 범주를 넘어선다”며 “작가가 남긴 적지 않은 양의 작업노트나 스케치들과는 근본부터 다르게 이들은 독자적인 드로잉/회화작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평한다. 미술평론가 신용덕씨는 그 독특함을 “건축적 드로잉과도 다르고 단순한 그림도, 메모도, 언술(言術)도 아닌 ‘빗맞힘’의 알레고리”라고 표현했다. 생전에 작가와 오랜 교분을 나눴던 신씨는 “박현기 선배는 건축가 김수근의 강의를 듣고, 회화를 해야만 현대미술을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전했다. 홍익대 회화과를 수료하고 전과, 건축과를 졸업한 작가의 이력을 떠올리면 드로잉 작업이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비디오 설치작품이 아예 없다면 서운하다. 넓직한 방을 따로 꾸며 전시하는 97년작 ‘만다라 시리즈:카오스 #2’는 역시나 강렬하다. 포르노 영상과 불교의 도상이 바둑판처럼 나뉜 화면에 교차하며 번쩍이는 모습은 전시 제목에 담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결합을 더욱 뚜렷이 느끼게 한다. 다듬이 방망이의 타격을 숱하게 겪었을 박달나무 다듬이대, 역시나 기차의 무게를 오래도록 겪었을 철도 침목을 뒤섞어 깔아놓은 90년작 ‘무제’를 비롯한 여러 설치작품 역시 그렇다. 이들 작품에서는 음양오행의 오행, 즉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다섯 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면면 역시 확인할 수 있다. 3월 12일까지.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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