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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지네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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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호 29면

정유년 첫 작품 ‘철계투오공’. 그런데 닭은 어디 갔지.

정유년 첫 작품 ‘철계투오공’. 그런데 닭은 어디 갔지.

얼마 전 중국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에 다녀왔다. 표면상 업무 출장이었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바로 미식 여행. 우리 회사에서 운영하는 라이언몰은 지난해 세계 각국의 맛집을 입점시키기 시작했다. 벌써 80여개에 달한다. 모두 맛보기 위해서는 하루에 5끼를 먹는다고 해도 2주는 걸린다. 이번 일정은 사흘밖에 되지 않아 턱없이 부족했다. 하여 쇼핑몰 사장이 엄선한 추천 맛집을 가기로 했다. 가는 곳마다 긴 줄이 늘어서있는 걸 보니 맛 또한 명불허전이리라.

우리는 새로 문을 연 찻집도 한 곳 소개받았다. 차는 지방분해 효과가 있으니 더욱 좋은 전략이라 여겼다. 590㎡(약 180평)에 달하는 전통 차관은 매우 특별한 정원을 갖추고 있었다. 남쪽 나라에서 온 식물들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바깥은 영하로 떨어진 추운 날씨인데 실내는 열대우림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이곳을 직접 설계한 류 사장은 화훼전문가였다.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내가 쑤저우(蘇州)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선 그곳 출신 문인들은 하나같이 창포를 아껴 책상에 올려두곤 했다고 일러주었다. 명대 중기의 화가 문징명(文徵明·1470~1559)과 문인 출신 화가인 당인(唐寅·1470~1523) 모두 동향 출신이자 내가 존경하는 분들이었다. 그들의 서재에 놓여져 있던 창포라니, 얼마나 고전적이고 우아한가.

류 사장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창포는 일본 교토에서 가져온 품종이라고 했다. 그는 내게도 선물할 테니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로 가져가라고 제안했다. 괜찮을까? 내가 알기로는 식물을 반출하는 건 위법인데. 하여튼 쑤저우 문인의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옆에 있던 사위는 내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곤 나를 대신해 집까지 가져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래, 상대방 성의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니까. 한번 시도해 보는 거지 뭐.

홍콩에서 환승해 장장 12시간 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이미 새벽 2시. 전전긍긍하며 상자를 열어보니 다행히 화분은 2개 다 무사했다. 안심하고 잘 수 있겠구나. 다음날도 나는 ‘새 친구’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다. 본디 화초 키우기에 재능이 없어 내 손을 거치는 것마다 죽어나갈 운명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지만, 새해가 시작됐고 못할 건 또 무언가. 나는 큰맘 먹고 붓을 집어들어 흙을 고르기 시작했다.

화분에 붓대를 꽂는 순간 조그만 벌레가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나는 바로 뒷걸음질쳤다. 뭐지. 움직이는 속도를 보니 지네인가. 나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화선지를 들고 그 불청객을 돌돌 말아 재빨리 붓을 씻는 통 안으로 던져넣었다.

평소 나는 살생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바퀴벌레라 할지언정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이지 않는 이상 죽이길 원치 않기 때문이다. 하물며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 아닌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쩐담. 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물통 가까이 다가갔다. 과연 포위는 성공했을 것인가. 놀랍게도 그는 이미 포위망을 빠져나와 유유자적하게 물위를 헤엄치고 있었다. 이럴 수가.

나는 이 장면을 카메라로 찍어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의견을 묻기 위함이었다. 머릿속 한구석에는 이미 그가 도망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가 진짜 지네라면, 더 커져서 큰 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이 상황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는 멀리서 온 아이였다. 나만 맞닥뜨리지 않았어도 칭다오 찻집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고 있는데 친구에게 답장이 왔다. 내 행동은 소중한 생명을 학대하는 행위란다. 아니 어떻게 나를 비난할 수가 있나. 물론 벌레를 책망할 사람은 없겠지만. 딩동. 다음 답장을 보낸 친구는 그의 안위를 걱정했다.

저녁 무렵 나는 다시 벌레를 보러 갔다. 그는 이미 헤엄을 멈춘 상태였다.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사건은 마무리지어야만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문득 영감이 떠올랐다. 붓을 들고 창포와 지네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중국 전통에 따르면 음력 설에는 연화(年畵)를 그려 대문에 붙이곤 한다. 올해는 정유년(丁酉年)이니 닭과 지네는 연화에 종종 함께 등장하는 소재였다. 게다가 나도 닭의 해에 태어났다. 나와 지네 역시 천 리를 떨어져 있어 서로 상관이 없었으나 기묘하게 맞닥뜨리게 된 것 아닌가. 비록 더 이상 함께할 순 없게 됐지만 추억을 만든 셈이다.

천추샤(陳秋霞·진추하)
라이언팍슨 파운데이션 주석
onesummernight7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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