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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트럼푸틴 시대의 한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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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박종수 전 주러시아 공사

박종수
전 주러시아 공사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에 취임하도록 도운 일등공신은 푸틴이다. 당선 직후 트럼프는 포브스 선정 세계 영향력 2위에 올라 연속 4년 1위를 차지한 푸틴과 함께 G-2 리더가 됐다. 둘은 대선 기간에 상호 호감을 드러내며 역설적으로 오바마 행정부와 클린턴 후보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트럼프와 푸틴의 밀월관계 시작
한국은 ‘스트롱맨’들에 둘러싸여
안보·경제에 미·러 관계 활용하는
외교력 발휘하면 시너지도 가능

트럼푸틴 G-2 리더는 여러 면에서 많이 닮았다. 첫째, 사적 친분을 중시한다. 두 지도자는 최대 7년간 국제 무대에서 함께 활동할 수 있다. 둘째, 민족주의자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트럼프의 슬로건은 푸틴의 ‘강한 러시아’와 맥을 같이한다. 셋째, 실용주의자다.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성과 거양에 주력한다. 넷째, 맨투맨 협상을 선호한다. 트럼프의 풍부한 협상 경험은 푸틴의 탁월한 협상 능력과 비견된다.

두 리더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사적 친분을 바탕으로 실용주의적 입장의 일대일 협상을 선호할 것으로 예측된다. 다만, 푸틴은 부국강병의 기치하에 옛 소련의 수퍼파워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국제 질서에 적극 개입해 왔으나,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에 입각해 국제 분쟁 개입을 자제하겠다는 입장이다. 목표는 비슷하나 방법론에 차이가 있어 오히려 이익 충돌의 상황을 피할 수도 있다.

그러면,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이 한반도에 던지는 함의는 무엇일까. 주목할 것은 미국의 트럼프, 러시아의 푸틴, 중국의 시진핑, 일본의 아베 등 주변 4강 리더가 모두 스트롱맨(Strong Man)이라는 사실이다. 트럼푸틴 시대의 개막은 한반도에 부담 요인도 되지만 우리의 외교력에 따라 시너지 효과도 기대해 볼 수 있다. 당장 조율해야 할 현안이 안보와 경제 문제다.

첫째, 안보 현안은 북한의 핵미사일 및 한국 내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문제다.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에는 동참하지만 무력에 의한 북핵 문제 해결을 극력 반대한다. 미국은 남한 내 사드 배치가 북한의 핵 도전에 대한 예방적 조치라고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자국을 겨냥한 MD 설치의 전 단계로 인식한다. 유럽(폴란드와 체코 MD)의 전례를 보아 러시아가 미국과 담판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한편 트럼프는 민주주의 이념을 강조했던 전직 대통령과는 달리, 북한 인권보다 북핵 해결을 위한 비용과 북핵 동결을 통한 이득 사이의 손익을 비즈니스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는 북한의 핵미사일을 동결시키기 위해 한국 정부를 깜짝 놀라게 하는 빅딜을 북측에 제안할 수도 있다. 또 미국 사거리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핵탄두 탑재기술을 개발 중인 북한에 대해 선제타격(preemptive strike)을 할 여지도 있다. 또한 트럼프는 푸틴과의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미·러 공조하에 중국을 압박하는 방식으로 북핵 문제 해결을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 사실상 푸틴도 ‘중국이 북한에 많은 경제적 지원을 하면서도 대북 영향력 행사에 미온적’이라고 지적해 왔다. 따라서 트럼프와 푸틴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함께 중국 압력에 공조 체제를 구축하는 양동전략을 구사할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둘째, 경제 현안은 이해 당사국 간 무역전쟁이다. 트럼프는 대선 과정에서 친러반중 입장을 노골화했다. 푸틴도 집권 이래 미국의 단일패권을 강도 높게 비난해 왔으나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후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협력할 수 있다는 유화적 태도로 한발 물러섰다. 오바마가 러시아 외교관 35명을 추방(PNG)하고 러시아 공관시설 2곳을 폐쇄했는데도 푸틴은 관행적으로 해왔던 맞추방조차도 자제하는 인내심을 보였다. 트럼프도 푸틴의 이러한 결정에 찬사를 보냈으며 서방의 대러 경제제재 조치를 해제할 수 있다고 발언함으로써 미·러 관계 복원에 긍정적 신호를 보냈다. 이는 트럼프가 ‘하나의 중국’ 정책을 무시하고 대만 총통과 통화하는 등 노골적으로 중국의 심기를 자극하는 것과는 사뭇 대조를 이룬다.

이 같은 트럼프의 입장은 푸틴의 신동방정책과 유라시아경제연합(EEU) 추진뿐 아니라 우리 기업의 러시아 진출에도 탄력을 줄 수 있다. 미국이 국제 금융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러시아의 외자 유치는 답보 상태이고 우리 기업들도 대러 진출 시 미국 금융권의 눈치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미·러 간 관계 회복은 TSR-TKR 연결사업 등 남북한-러 3각 경협 추진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또한 연해주 지역에 제2개성공단을 조성해 러시아의 자원, 북한의 노동력, 한국의 자본과 기술로 사업에 착수하는 계기도 마련할 수 있다.

고래는 싸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춤도 춘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질 수 있지만, 춤추는 고래들과 함께 새우 떼가 유영할 수 있다. 한국은 주변 4강, 특히 강성 지도자들의 기 싸움에 희생될 수도 있지만, 이들의 관계를 주도할 경우에 균형자적 강소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의 국론 결집과 외교 역량에 달려 있다. 대전제는 최순실 게이트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차기 정부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는 것이다.

박종수 전 주러시아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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