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삿포로 겨울아시안게임(2월 19~26일)이 개막 전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참가국 선수 숙소로 사용될 호텔 측에서 역사 왜곡 등 극우 성향의 서적을 객실에 비치하면서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하고 있다. 대회 조직위원회가 나서면서 뒤늦게 호텔 측이 서적을 치우기로 했지만 아시아의 겨울축제를 앞두고 한·일, 중·일 감정의 골은 깊을 대로 깊어졌다.
삿포로 겨울아시안게임 조직위는 이번 대회를 앞두고 참가국 선수단이 묵을 선수촌을 따로 짓지 않고, 대신 호텔체인인 아파(APA)호텔이 운영하는 삿포로 마코마나이 호텔&리조트를 선수 숙소로 지정했다. 비즈니스호텔 체인인 아파호텔은 일본 전역에 호텔 413개, 7만여 개의 객실을 보유하고 있다. 이번 대회 참가선수는 31개국 2000여명. 이들이 묵을 삿포로 마코마나이 호텔&리조트는 객실이 903개인 이 지역 최대 규모 호텔이다.
한국·중국 등 대표팀 머물 호텔에
위안부·난징학살 부정하는 책 비치
“사실 근거한 역사” 버티던 호텔
한·중 항의 거세지자 “치우겠다”
조직위는 주요 종목 경기장과 가깝다는 이유로 이 호텔을 선수단 숙소로 지정했다. 한국 선수단의 경우 오비히로(홋카이도 남쪽)에서 경기가 열리는 스피드스케이팅 및 선수단 규모가 커진 남자 아이스하키를 뺀 나머지 170여 명의 선수·임원 등이 이 호텔에 묵을 예정이다.
문제가 불거진 건 지난 16일 한 중국인 관광객이 ‘웨이보(微博)’에 극우 성향 서적들이 비치된 호텔 객실의 동영상을 올리면서다. 객실 책상 서랍에 ‘아무도 말하지 않는 국가론’ ‘자랑스러운 조국 일본, 부활로의 제언’ 등의 책자가 비치된 것을 중국 관광객이 발견한 것이다. 아파호텔 창업주인 모토야 도시오(元谷外志雄·73)가 저술한 이 책들에는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징용이나 난징 대학살 등을 부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모토야 회장은 이 책에서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된 주장은 허구인데 한국이 국익을 위해 이용한다” “난징 대학살(일본군이 1937~38년 중국 난징에서 30여만 명을 학살한 사건)은 중국 정부가 조작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극우 성향 책자를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극우 강연단체도 운영하는 우익인사다.
일본 정부 "민간 호텔 문제” 한·중 반발 키워
중국은 곧바로 반발했다.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17일 정례브리핑에서 “일본의 일부 세력이 계속해서 역사를 부인하며 왜곡을 기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중국인들 사이에서 아파호텔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중국 정부는 24일 자국 여행업체들에 대해 “아파호텔을 이용하지 말라”는 지침까지 내렸다. 이 때문에 겨울 아시안게임에 참가할 중국 선수단은 숙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방안도 검토했다.
처음엔 아파호텔도 물러서지 않았다. 호텔 측은 17일 홈페이지에 “사실에 근거한 역사를 독자에게 알리는 목적으로 쓴 책이다. 많은 비난이 있더라도 이 책을 객실에서 치울 의사가 없다”고 했다. 호텔 측은 20일 조직위로부터 “책을 치워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거부했다.
일본 정부는 미온적인 태도로 문제를 더 키웠다.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일본 관광부 부장관은 24일 “일본 정부로선 (중국 측 반발에) 일일이 대응하고 싶지 않다. 민간 호텔이 고객 서비스 일환으로 둔 서적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은 뒤늦게 대응에 나섰다. 대한체육회는 25일 일본올림픽위원회(JOC)와 조직위에 서한을 보내 시정을 요구했다. 체육회 측은 “조직위에 20일부터 유선상으로 시정조치를 요구했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어 공식 입장을 담은 서한을 보냈다”고 설명했다. 체육회는 일본 측에 ‘어떠한 정치적·종교적·인종적 선전도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대회 관련 장소에서 허용되지 않는다’는 OCA 헌장 제36조 부칙을 들어 “스포츠 기본 이념을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 시정하라”고 요구했다. 한·중 양국의 강력한 요구가 이어지자 호텔 측은 25일 조직위를 통해 “책자를 치우겠다”는 답변서를 보내왔다. 하지만 역사 왜곡에 노골적인 호텔 측과 미온적인 일본 정부의 태도로 인해 이번 겨울 아시안게임은 개막 전부터 갈등을 예고하게 됐다.
김지한 기자 kim.jih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