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총기 피살 흑인 목사 장례식서 ‘화합’ 노래한 그가 떠난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10일 시카고 고별연설 중 잠시 상념에 빠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오바마는 겸손으로 전 세계에 감동을 줬다. [시카고 신화=뉴시스]

지난 10일 시카고 고별연설 중 잠시 상념에 빠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오바마는 겸손으로 전 세계에 감동을 줬다. [시카고 신화=뉴시스]

버락 오바마 제44대 미국 대통령이 8년(2009~2017년)의 임기를 마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20일(현지시간)이면 도널드 트럼프가 45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버락 후세인 오바마 2세, 역사 속으로

앞서 오바마는 10일 정치적 고향 시카고에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고별연설을 했다.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지도자의 힘이 진솔한 연설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켜준 순간이었다. 헌법학·정치학 교과서에 나오는 ‘주권재민’의 원칙이 연설을 지배했다. “미국 국민이 나를 정직하게 이끌었고 영감을 불어넣었으며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나는 매일 여러분으로부터 배운다” “여러분이 나를 더 좋은 대통령,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명문은 이런 원칙에서 나왔다.

경제·외교 등 임기 중 치적을 모두 국민 덕으로 돌리고 감사 인사에 상당한 시간을 들였다. 오바마는 “그렇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해냈다(Yes we can, Yes we did)”라는 희망과 긍정의 주문으로 청중과 미 국민을 열광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다. 마지막까지 민주주의의 가치, 지도자의 덕목, 정치의 힘을 선명하게 보여줬다. 오바마는 긍정의 힘으로도 존경받아왔다. 이는 숱한 연설에서 고스란히 발휘됐다. 오바마는 당선 수락 연설에서 ‘그렇다. 우리는 할 수 있다(Yes we can)’는 메시지를 국민 앞에 던졌다. 의지와 신념의 ‘초지일관(初志一貫)’ 지도자가 아닐 수 없다. 물러가기 직전에도 57%의 지지율을 얻는 이유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해냈다”

오바마는 국민의 마음속으로 다가가는 지도자였다. 대통령 재임 중 최고의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2015년 6월 26일 백인 극단주의자 청년의 총기 난사로 숨진 흑인 목사의 장례식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당시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농구경기장에서 열린 장례식에 참석한 오바마는 6000여 명의 성난 추모객 앞에서 30분간 연설을 했다. 그러다 갑자기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미국의 첫 아프리카계 대통령으로서 극단주의·인종차별·폭력을 비난하고 엄벌·법치·정의를 부르짖는 열광적인 연설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 사람이 많았다. 하다못해 국민 통합이나 인종차별 철폐라도 외칠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오바마는 그 자리에서 누구도 꾸짖지 않았다. 대신 굵직한 바리톤 음성으로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기 시작했다. “놀라운 은혜, 나 같은 비참한 사람을 구해주셨네. 한때 길을 잃었으나, 지금 인도해주시고….” 1779년 영국 성공회의 존 뉴턴 신부가 만든 이 찬송가는 노예무역에 종사했던 과거를 반성하고 죄를 사해준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내용으로 미국 민권운동 현장에서 자주 불렸다.

영결식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박수와 함께 오바마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들의 얼굴에는 분노와 좌절 대신 희망과 감동으로 넘쳤다. 엄숙하고 분노로 가득했던 장례식장은 웃음과 갈채가 가득한 화합의 장으로 변했다. 분열된 나라에서 특정 세력이나 범죄자·죄인을 비난하기는 쉽다. 하지만 희생자의 장례식장에서 오바마의 선택은 법률이나 정치가 아니라 국민을 하나로 잇는 신앙이었다. 비난이 아니라 화합이었다. 그런 오바마의 행동을 통해 미 국민은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어떤 나라여야 하는지를 새롭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재임 중 미 국민이 그를 가장 자랑스러워했을 순간으로 평가할 수 있다. 지도자는 어떤 존재라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법과 물리력이 아닌 용서의 마음과 뜨거운 감성을 앞세웠다. 오바마는 이렇게 국민 마음속에 직접 다가감으로써 포용과 감동의 힘을 보여줬다.

 전문가에게 자리를 양보한 겸손한 지도자

2011년 5월 1일 미 백악관 상황실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조 바이든 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 마이클 멀린 합참의장, 윌리엄 데일리 백악관 비서실장과 함께 미 해군 특수부대의 오사마 빈라덴 급습 작전 실황을 지켜보고 있다.

2011년 5월 1일 미 백악관 상황실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조 바이든 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 마이클 멀린 합참의장, 윌리엄 데일리 백악관 비서실장과 함께 미 해군 특수부대의 오사마 빈라덴 급습 작전 실황을 지켜보고 있다. [중앙포토]

오바마가 전 세계에 감동을 준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겸손함이다. 미 국민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된 순간이 있다. 2011년 5월 1일 파키스탄 북부 도시 아보타바드에서 벌어진 작전명 ‘제로니모 E-KIA’의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을 지켜보는 장면이다. 일요일이던 이날 오바마는 자신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평상시대로 행동하라’. 이날 오전 9시42분 백악관을 나선 오바마는 인근 세인트앤드루스 공군기지의 군 골프장에서 골프를 쳤다. 9홀만 마치곤 경기를 중단하고 오후 2시4분 백악관으로 황급히 돌아온 그는 골프 복장과 신발 그대로 지하 1층 상황실로 향했다. 조 바이든 부통령,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 마이크 멀린 합참의장이 이미 모여 있었다. 미국 안보를 책임지는 최고위 국가안보 팀원들이다. 사흘 전 오바마가 승인했던 빈 라덴 제거 작전의 시작을 두 시간쯤 남겨둔 시점이었다.

놀라운 일이 다음 순간 벌어졌다. 오바마는 상황실 한가운데 있는 큼지막한 대통령 의자를 특수전 전문가인 마셜 웹 합동특수전사령부 부사령관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구석의 낮은 의자에 쪼그리듯 앉았다. 리언 패네타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기획한 이 작전은 미 해군 엘리트 특수부대인 네이비실 중에서도 가장 정예조직인 실6(SEAL-6)팀이 실행했지만 오바마는 미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으로서 작전의 명령권자다. 그럼에도 중앙 자리를 작전 전문가에게 넘겼다. 이들은 대형 삼성 모니터를 통해 버지니아주 랭글리에 있는 CIA 상황실의 패네타 국장과 화상으로 연결됐다. 작전은 40분 만에 마무리됐다. 9·11 테러 9년8개월 만에 미국이 ‘공적 1호’를 제거한 순간이었다.

오바마는 이날 저녁 생방송으로 대국민 연설을 했다. “우리는 그를 잡았다(We got him). 이제야 정의가 실현됐다. 세계는 더 안전해졌다. 빈 라덴 사살은 10년에 걸친 테러와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성과다.” 이런 연설을 하는 동안 오바마는 한 번도 웃지 않았다. 빈 라덴 사살로 테러와의 전쟁이 끝난 게 아니라 단지 2막으로 넘어갔을 뿐이란 걸 보여주기 위한 선택으로 평가된다. 오바마는 한 번도 이를 자신의 공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오바마는 연설과 품성만 뛰어난 게 아니라 정치적 업적도 뛰어나다. 그는 자신의 말과 약속을 지켰다. 오바마는 임기 첫 두 해를 경제 회복에 주력했다. 2008년 오바마 취임 당시 2007년의 서브프라임모기지 금융위기로 휘청대던 미국 경제는 그의 재임 중 되살아나기 시작해 첫해 -2.8%였던 경제성장률이 지난해 3분기 3.5%까지 뛰었다. 재임 중 1560만 개의 일자리를 새로 만들어 실업률을 7.8%(2009년)에서 3.5%로 낮췄다. 오바마케어로 자비 부담 건강보험도, 정부 제공 의료보호도 받지 못하던 중간층 2300만 명이 새롭게 건강보험 혜택을 받게 했다.

경제·외교 분야서도 뛰어난 업적

2009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오바마는 아프가니스탄 내전을 종식하지도, 이라크에서의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를 제거하지도, 시리아 내전을 완화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평화를 해칠 수 있는 중요한 글로벌 갈등 요소 두 가지를 해결했다. 오바마는 오랫동안 ‘입속의 검은 잎’이던 이란·쿠바에 손을 내밀었다. 핵 개발 의혹으로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집중적인 제재를 받던 이란을 설득해 핵 활동 제한의 대가로 경제제재를 순차적으로 풀고 있다. 이란은 2002년 이후 핵무기 개발 의혹을 받아왔으며 2006~2010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1~4차 제재 결의안 채택에 의해 경제제재를 받아왔다. 하지만 오바마는 무력이 아닌 ‘P5+1(유엔 안보리 5대 상임이사국인 미국·러시아·중국·프랑스·영국+독일)’과의 협상을 통해 새로운 대화의 시대를 열었다.

천연가스 매장량 세계 1위, 석유 매장량 5위인 이란을 새롭게 국제경제 질서 속에 편입시킴으로써 이란과 서방이 윈윈의 성과를 거두게 됐다. 이란은 지난 12일 프랑스 툴루즈의 에어버스 공장에서 출고된 A321 여객기를 인도받음으로써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38년 만에 처음으로 새 여객기를 도입했다. 그간 이란은 제3국을 통해 중고 여객기만 구입해왔다. 한국도 이란과의 경제협력 기대에 부풀어 있다.

오바마는 미국과 쿠바가 1961년 국교를 단절한 지 54년 만에 대사급 외교관계를 복원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2015년 7월 20일 워싱턴에서 쿠바대사관이, 8월 14일 아바나에 미국대사관이 각각 다시 문을 열었다. 양국 재수교는 역사적인 앙금을 푸는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된다. 다만 북핵에는 ‘전략적 인내’로 일관해 북한이 핵과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할 시간을 벌어줬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제복 입은 사람들 존경하는 데 앞장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육군 법무 담당 다니엘 라이트 소장 (맨 오른쪽)과 함께 29일 (현지시간) 미 델라웨어주 도버 공군기지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병사의 관을 향해 경례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이달에 55명의 미군이 숨졌다. [도버 AP]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육군 법무 담당 다니엘 라이트 소장 (맨 오른쪽)과 함께 2009년 10월 29일 (현지시간) 미 델라웨어주 도버 공군기지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병사의 관을 향해 경례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이달에 55명의 미군이 숨졌다. [도버 AP]

오바마는 미군 통수권자로서 제복 입은 사람을 존경하는 자세로 감동을 줬다. 2009년 10월 29일 심야에 오바마는 전용헬기인 마린1을 타고 델라웨어주 도버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이윽고 대형 수송기인 C-17이 도착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 15명과 마약수사국 요원 3명 등 전사자 18명의 관을 내려놓았다. 오바마는 관이 수송기에서 자동차로 옮겨지는 동안 바람 부는 비행장에 차렷 자세로 서서 위엄 있는 거수경례로 전사자를 맞았다. 운구가 끝나자 현장의 유족들을 위로한 뒤 새벽 4시쯤 현장을 떠났다. 미군은 싸우다 전사할 수는 있지만 절대 외롭지 않음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미국의 군인이나 공직자는 물론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긍지를 느꼈을 장면이다. 어디 미국인뿐이랴.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은 이런 대통령의 명령을 받는 군대와 국민, 나라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오바마는 지난해 11월 4일 노스캐롤라이나주 페이어트빌주립대 체육관에서 열린 힐러리 클린턴 지지연설 도중 트럼프 지지자가 난입해 소리를 지르는 순간에도 이런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는 “제복을 입고 있는 그분은 미국을 위해 헌신했을 수도 있으니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며 난입한 사람을 끌고 가는 보안요원을 제지했다. 그리고 청중에게 “야유하지 말고 투표하라”고 당부했다.

솔선수범의 용기 보여준 지도자

에볼라에 감염됐다 완치 판정을 받은 간호사 니나 팸 이 오바마 대통령과 포옹하고 있다. [중앙포토]

에볼라에 감염됐다 완치 판정을 받은 간호사 니나 팸이 오바마 대통령과 포옹하고 있다. [중앙포토]

오바마는 솔선수범의 지도자였다. 2014년 미국 전역에서 자고 나면 에볼라 환자가 퍼지는 상황에서 대통령으로서 모든 조치의 정점에 직접 나섰다. 그는 “공포에 휘둘리지 말고 과학과 사실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에볼라 환자를 치료하다 감염된 간호사 니나 팸이 완치 판정을 받자 만나서 포옹하고 볼키스까지 나눴다. 그 사진은 국민을 감동시켰다. 에볼라는 치료 가능할 뿐 아니라 완치되고 나면 감염 위험이 없다는 메시지를 대통령이 직접 전한 것이다. 감염 위험이 없다는 사실을 대통령이 몸소 보여줌으로써 국민을 안심시키려는 의도였다. 대통령이 이렇게 솔선수범하자 피어볼라(공포를 가리키는 피어와 에볼라의 합성어로 에볼라 공포를 가리킴)는 서서히 진정 국면에 들어갔다.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실천에 국민이 감동했다. 미국에서 에볼라 사태는 실제로 큰 피해 없이 마무리됐다.

국민을 감동시키는 오바마가 있어 미국인들은 지난 8년간 행복했을 것이다. 오바마의 가장 ‘문제적’ 유산은 후임이 트럼프라는 사실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미 국민은 오바마와의 추억을 뒤로하고 새로운 시대의 도전을 감당할 준비를 해야 한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