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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민섭의 변방에서

우리는 세월을 기억하고 그리는 존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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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며칠 전 카드 결제를 하고 서명을 하는 동안 점원이 나에게 “혹시 의미가 있는 서명인가요?”하고 물었다. 나는 3년째 같은 서명을 해 왔다. 내심 누군가 물어봐 주지 않을까 했는데 그게 어제였다. 마음 같아서는 “물어봐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이건 말이죠” 하고 그에게 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어라 답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함께 온 친구는 “의미는 무슨, 그냥 성의가 없는 거죠” 하고 웃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저 그게, 추모의 의미입니다” 하고 답했다. 누구나 아는 리본 모양의 간단한 선, 아무런 의미도 성의도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어느 날부터 그것을 일상으로 가져왔다. 천 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계속해서 리본을 그렸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결제하든 그 서명은 하나의 세월로 전송되었다.

우리는 백화점에서, 편의점에서, 음식점에서, 여러 익숙한 공간에서 물건과 서비스를 구매하기 위해 신용카드를 꺼낸다. 그러고는 펜을 들고 서명을 한다. 하지만 숨 쉬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해야 하는 이 행위에, 그 어떤 의미나 성의를 부여하지 않는다. 선을 긋거나, 동그라미를 만들거나, 아니면 하트를 그리기도 하고, 가끔은 점원이 그 작업을 대신하기도 한다. 나도 오랫동안 그래 왔다. 다만 어느 잊고 싶지 않은 재난을 목도하고서야 일상의 가장 흔한 행위에 아주 작은 의미를 부여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날은 한 번, 다른 어느 날에는 열 번, 그렇게 몇 천 개의 리본을 그리는 동안 그것이 추모인지 무슨 의미인지 나도 잊었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 그렇게 할 뿐이다.

추모를 위한 행위라는 나의 말에 친구는 ‘헐’, 하고는 나를 바라보았고 점원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나에게 영수증을 건네며 “앞으로는 저도 이 서명을 사용하겠습니다”고 했다. 친구는 “저도 그래야겠어요”라고 했다. 그들은 리본을 그려 온 나의 세월을 비웃지 않았고 오히려 같은 세월을 함께할 것을 선언했다. 나는 그들의 옷깃이나 가방에 리본이라도 하나씩 달아주고 싶은, 그런 심정이 되었다.

가장 익숙한 일상을 나는 조금은 더 소중히 대하고 싶다. 어느 소박한 의미를 담아내고 싶다. 리본으로든 그 무엇으로든, 추모가 되든 그 무엇이 되든, 우리는 그렇게 하나의 세월을 기억하고 그리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약력

연세대 국문학과 졸업, 인문학협동조합 연구복지위원, 『대리사회』 저자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