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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한자성어 돌연유행 압축화법 포복절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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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사전에도 없는 사이비 사자성어

지난해 축구국가대표팀 본 프레레 감독 경질론이 떠올랐을 때 인터넷에서는 이동국 선수가 '완전소중 본 프레레'라는 피켓을 들고 감독 교체 반대시위를 벌이는 패러디 사진이 화제가 됐다(본 프레레 감독 체제에서 황태자로 떠오른 이동국이 감독 교체를 반대한다는 내용으로 사실과 전혀 다르다). 이후 '완전소중(完全所重)'이란 말은 '대략난감'처럼 여러 상황에서 응용가능한 말이 됐다.

사전에도 나오지 않고, 단순한 단어의 나열이지만 '이심전심'으로 '대략' 뜻이 통하는 '사이비' 한자성어들. 진짜 대화보다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메신저 채팅에 더 익숙해져 가는 요즘 젊은이들의 '말놀이' 작품이다. 인터넷 댓글, 휴대전화 문자, 채팅에서나 등장하던 이런 한자성어들이 광고나 TV드라마 등 언어생활의 제도권으로도 흡수되고 있다.

무협 애니메이션이란 새로운 형식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기아차 스포티지 광고를 보자. 만화 주인공인 무협의 고수는 '축지주행(縮地走行.축지법을 쓰듯 힘차고 빠르게 내달린다)''만차주차(滿車駐車.주차장이 가득 찼을 때도 좁은 공간에 날렵하게 주차할 수 있다)''여심흡수(女心吸收.젊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등의 '주행신공(走行神功)'을 선보인다. 원래 광고카피란 게 제품 컨셉트를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파격을 자주 사용하지만, 이번 스포티지 광고 카피는 그야말로 '완전파격(完全破格)'이다. 광고를 만든 광고대행사 이노션의 박정미 부장은 "사자성어처럼 만드는 작문법이 젊은이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고 설명했다.

고루한 한자 - 기발한 말놀이 '통' 하다

TV드라마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나라가 입헌군주국이라는 상상하에 황실에서 벌어지는 로맨스와 암투를 다룬 MBC 드라마 '궁'의 한 장면을 보자. 어려운 집안사정을 고려해 황태자비가 되기로 결심한 신채경(윤은혜 분)이 황태후(김혜자 분)를 찾아가 대화를 나눈다. '발랄소녀' 채경이 뱉어내는 정체불명의 한자어(열공, 대략난감, 압박, 좌우당간)에 황태후는 '완전난감'해 한다. 조사만 빼고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다.

원작 만화에도 나오지 않는 이런 대사들이 왜 드라마에 등장한 것일까. 연출자 황인뢰 PD는 "열공이란 단어를 처음 듣고 참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며 "젊은 층에 어필하기 위해 그들의 언어표현을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god의 히트곡 '거짓말'의 한자버전 가사는 한 편의 고시(古詩)를 연상케 한다. '난 니가 싫어졌어. 우리 이만 헤어져. 다른 여자가 생겼어. 너보다 훨씬 좋은…'이란 가사는 '본인 귀하기피 충동(本人 貴下忌避 衝動) 오등관계 종지부(吾等關係 終止符) 기타여성 교제개시(其他女性 交際開始) 귀하비교 월등우수(貴下比較 越等優秀)'로 해괴하게 뒤바뀐다. 어법에는 맞지 않지만 어쨌든 뜻은 통하는 한자성어가 양산되는 것은 끝말줄임과 단축어로 대변되는 채팅.문자메시지 화법과 일맥상통한다는 분석이다.

복고적인 무협 뉘앙스가 매력 ?

20대 중반의 한 여자 직장인이 자신의 미니홈피에 올린 글을 보면 축약형 화법이 어느 정도 젊은이들의 언어생활에 침투해 있는지 알 수 있다. '생일축하 오만년만 **월드 퇴근직후 오빤양복 난미친소.' 풀어 해석하면 '오랜만에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퇴근 직후 오빠(남자친구)와 함께 놀이공원에 가서 오빠는 양복을 입은 채로, 나는 해바라기(SBS '웃찾사'중 '그때그때 달라요' 코너의 한 소품)를 귀에 꽂은 채로 즐겁게 놀았다'는 뜻이다.

'돌발미팅. 대략낭패. 도착지연'이라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갑자기 회의가 생겨 곤란한 상황이라 약속시간보다 좀 늦게 갈 것 같다)는 윗글에 비하면 독해 기초수준에 가깝다. 압축 표현이라는 '경제성' 외에도 한자성어 말놀이는 '형식 파괴'라는 쾌감을 가져다 준다는 분석이다. 직장인 박모(26)씨는 "어법 신경 쓰지 않고 말을 만드니까 형식파괴의 쾌감을 느낀다"며 "사자성어를 만드는 것도 재미있지만, 남들이 만든 사자성어를 해석하는 것도 재미있다"고 말했다.

제일기획의 김홍탁 제작국장은 "한자성어처럼 만드는 말놀이가 휴대전화 문자세대의 의사소통 패턴과 맞아떨어져 하나의 유행이 됐다"며 "인터넷, 채팅, 휴대전화 문자 등 말놀이 욕구를 풀 수 있는 장(場)이 많이 생겨난 것도 이 같은 유행의 한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요즘 하나의 트렌드를 이루고 있는 '복고' 취향을 주는 동시에 세대를 뛰어넘는 영원한 판타지인 무협의 뉘앙스를 풍기는 것도 사자성어 말놀이의 매력이란 분석이다. 광고대행사 이노션 마케팅팀의 김세진 차장은 "열심히 공부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열공'이라 하면 복고적이고 무협지적인 느낌을 준다"며 "전문집단만이 생산하던 유행어를 젊은 층 자신들이 유쾌하게 비틀고 짜맞춰 재미있게 만들어낸다는 사회적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정현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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