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소녀상 설치 후폭풍 예견하고도…외교부 “지자체가 알아서 할 것” 뒷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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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에 소녀상이 세워질 경우 한·일 관계에 불어닥칠 후폭풍을 외교부는 이전부터 예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최소화할 대비는 하지 않았다.

“여론 두려워도 할 일 했어야” 지적
동구청 “철거하려면 외교부가 하라”

일본 측은 그간 공식·비공식 접촉을 할 때 총영사관 앞 소녀상 설치 가능성에 수차례 우려를 표했다. 일본은 지난해 6월 모리모토 야스히로 총영사를 부산에 보내며 “소녀상만은 막아야 한다”는 ‘특명’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외교부는 부산 동구청이 도로법상 점유 허용 대상이 아니란 이유로 설치를 불허하고 있는 것만 믿었다. “해당 지자체가 알아서 판단할 사안”이란 입장을 유지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28일 시민단체가 설치한 소녀상을 강제 철거한 뒤 국민적 비난이 일자 박삼석 부산 동구청장은 입장을 바꿔 이틀 만에 소녀상 설치를 묵인했다. 외교부는 그제야 동구청 측에 이전을 요구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박 구청장은 11일 기자와 만나 “처음부터 자기들이 막든지…. 한·일 문제는 외교 관계이니, 소녀상을 철거하려면 외교부가 하라”고 못 박았다.

외교부는 지금도 “외교공관 보호와 관련된 국제 예양(禮讓) 및 관행이라는 측면에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모호한 입장만 반복하고 있다. 외교부 당국자에게 “부산 소녀상은 12·28 합의에 반하는가”라고 묻자 “드릴 수 있는 입장이 없다”고 답했다.

전문가들도 외교부 대응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외교부 고위 공무원은 “여론이 두려워도 외교부가 국제 외교 관례에 맞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어야 하는데, 마치 남 얘기하듯 두루뭉술한 입장만 내놨다”고 지적했다.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는 “외교도 결국 내치의 연장”이라며 “정부가 외교를 독점해서도 안 되고, 국민적 여론을 외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소녀상 문제에 있어 보다 적극적인 여론 수렴 과정이 필요했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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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소녀상이 ‘외교 관계에 관한 빈 협약’ 22조를 위반한다는 일본 측 주장에 대해선 명확한 해석이 아직 없다. 빈 협약 22조 2항은 “(외교사절) 접수국은 공관의 안녕을 교란시키거나 품위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할 특별한 의무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기범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국제재판소에 회부 시 한국의 승소 가능성이 크다. 주재국의 의무는 공관의 품위 손상 가능성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데, 정부는 소녀상 설치를 반드시 막을 정도의 의무를 부여받진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수진·유지혜 기자, 부산=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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