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자 틀린 수첩 전량 리콜 … 오롬시스템 이호열 사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4면

수제(手製) 고급 문구업체인 오롬시스템의 이호열(51.사진) 사장은 '한국의 몽블랑'을 꿈꾸는 경영자다. 최고급 문구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독일 문구업체 몽블랑처럼 언젠가 오롬을 세계 최고의 명품 문구 브랜드 반열에 올려놓겠다는 야심이다.

최근 제작한 다이어리에서 영어 한 글자가 틀린 점이 발견되자 바로 1억원어치에 이르는 제품 전량을 리콜, 폐기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1억원은 오롬시스템의 지난해 영업이익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17일 서울 을지로 3가에 위치한 회사에서 만난 이 사장은 "오롬의 존립 기반은 고객의 신뢰와 믿음"이라며 "최고급 문구업체를 지향하는 우리로서는 리콜은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오롬의 제품 폐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7년 다이어리 사업을 처음하면서 내놓은 제품이 마음에 안들자 다이어리 5000세트를 폐기하기도 했다. 당시 연매출이 17억원에 불과했는데 폐기한 제품의 제조원가는 1억3000만원에 달했다. 이 사장은 "당시 회사가 자금이 쪼들릴 정도로 타격을 받았지만 '딛고 일어서든지 아니면 망하든지' 하는 각오로 폐기를 했다"며 "나나 종업원에게 큰 자극이 됐다"고 말했다. 1995년 삼성전자가 이건희 회장의 지시로 500억원어치에 달하는 휴대전화를 전량 소각한 것과 같은 논리라는 것이다. 결과는 좋았다. 첫 제품의 대량 폐기 후 나온 후속 제품은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사업 첫해에 1억여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후 품질에 대한 인정을 받으면서 매년 20~30%씩 회사가 커 나갔다. 다이어리로 문구사업을 시작한 오롬시스템은 해마다 서류가방과 지갑 등 새로운 문구류를 출시해 현재 60여종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국산 브랜드론 오롬시스템 등 몇개 업체가 외국산과 맞서고 있다. 오롬 제품의 절반은 기업체나 협회 등에 납품되고, 절반은 교보문과와 영풍문고 등의 매장에서 판매된다. 검정 가죽 표피에 금색으로 사용자의 이름이 새겨진 포켓 다이어리는 이 회사 효자품목이다. 이 사장은 "오롬의 품질은 몽블랑의 95% 수준에 이른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값은 아직 몽블랑의 20%에 불과하다"며 "앞으로 20년 뒤에는 세계 시장에서 몽블랑과 어깨를 겨룰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장은 학생운동권 출신 사업가다. 경복고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그는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막 끝난 뒤 계엄령 하에서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돼 2년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뒤 서울대 앞 복사가게를 시작으로 인쇄업을 하다가 고급 문구업체로 전업했다.

최준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