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반영웅주의적 악당소설|김주영소설 『활빈도』정현기<문학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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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김주영의 『활빈도』는 구한말(1900∼1907년)의 붕괴된 정치질서와 함께 극도로 불안에 떨던 민심의 소재를, 이른바 「활빈당」이라 불린 도적들의 공초기록을 근거로 해서 소설적으로 펼쳐 보인 악당소설의 하나다.
서울·충청도·전라도 지역을 활동무대로 삼은 당시의 도적들은 주세력이 충청도 내포 (당진·서산·태안반도·홍성·청양등)를 조직망의 본거지로 삼았는데(물론 일정한 둔소는 두지 않았다), 양산의 통도사와 문경새재를 근거지로 하여 활동한 무리들 역시 당시의 중심인물인 마중군(본명은 마학봉)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는 이른바 게릴라적 특징을 지닌 전술을 활용하고 있어 흥미롭다.
주로 지방의 냉혹한 토호들이나 부패한 벼슬아치들의 재물을 털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했기 때문에 그들은 굶주린 많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굶주린 농민과 상인들 자신이 통발만 떴다 하면 자발적으로, 변성명한 채, 그 적당에 가담하고 있었음을 이 작품은 요연하게 보이고 있다.
『활빈도』의 작품적 특징은 아마도 반영웅주의적인, 말하자면 적극적인 민주주의 이념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으로 들어야 할 것이다. 오랜 세월을 왕권이나 독재 치하에서 살아온 백성들 마음 속에는 으례 비뚤어진 영웅주의가 자리잡게 마련이다. 훌륭한 영웅이 나타나 우리의 질곡을 타파해 주길 바라는 비겁한 의타심 말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뛰어난 영도자> 따위의 낯간지러운 수식어를 공식적이거나 묵시적으로 주렁주렁 앞가슴에 붙였던 지도자 쳐놓고 탐욕스럽고 부도덕하며 광적인 소인배 아닌 사람이 과연 동서의 역사이래 몇이나 될까? 상식적인 사람, 도덕성에 큰 손상이 없는 사람, 탐욕스럽지 않은 시민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정치행정에 관한 꿈을 우리는 문학 작품들속에서 자주 읽을 수 있고, 그것은 어쩌면 특출한 한 사람에 의해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의존적인 영웅주의가 아니라 백성 모두가 참여하는 민주주의에의 열망의 소설적 표현에 다름 아닐 터이다.
김주영의 대하 장편소설 『활빈도』는 영웅주의적으로 민심을 유도하는 정평있는(『삼국지연의』『수호지』『임꺽정』등) 악당소설들에 비해 퍽 민중·민주주의적 시각으로 쓰여진 한국 최초의 악당소설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를테면 이 작품에서 정점을 이루는 제1인물인 마중군은 비록 동학당의 잔존세력이나 영학당·상인·농민들이 떠받드는 특출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당간의 이익 분배에 차등을 두지도 않았고 사리사욕을 채우지도 않음으로써 도당모두가 마중군으로 행세할 수 있는 세력 균배 원리를 실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비록 남의 재산을 빼앗는 범법자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었지만 그들끼리 세우고자 했던 공동윤리는 제대로 잘 지켜졌던 것이다. 그들을 체포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지식인 윤형렬의 고뇌 내용 역시 탐욕 그 자체가 죄악이며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평범 이상의 민주주의적 메시지를 보이는 인물로 이 작품은 잘 살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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