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대신 공무원시험”…노량진 상담생 10명 중 3명꼴 고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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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서울 노량진에 있는 한 공무원시험 준비학원(공시학원) 강의실에 수강생이 몰려 빈자리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수강생 중에는 지난해 11월 대입 수능을 치른 고3 학생도 적지 않다. 이들은 대부분 재수를 해서 대학에 진학하느니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일찌감치 취업 걱정을 덜겠다는 생각이다. [사진 우상조 기자]

지난 2일 서울 노량진에 있는 한 공무원시험 준비학원(공시학원) 강의실에 수강생이 몰려 빈자리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수강생 중에는 지난해 11월 대입 수능을 치른 고3 학생도 적지 않다. 이들은 대부분 재수를 해서 대학에 진학하느니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일찌감치 취업 걱정을 덜겠다는 생각이다. [사진 우상조 기자]

지난 2일 오후 공무원시험 준비학원이 밀집한 서울 노량진 일대에서도 규모가 가장 큰 G학원의 한 강의실. 9급 공시(公試) 준비반인 150석짜리 강의실엔 빈자리가 드물었다. 수강생 중엔 아직 고교생 티를 벗지 못한 앳된 얼굴의 청소년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지난해 11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김모(19)군도 그중 한 명이다. 김군은 “수능 점수가 생각보다 낮게 나와서 바로 공시 학원에 등록했다”며 “재수를 해서 대학에 가봐야 취업도 어려운데, 일찌감치 공무원시험을 준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학원의 상담 창구엔 부모와 함께 방문한 학생이 적지 않았다. 어머니와 함께 온 유모(19·고3)군은 “지금 공시 준비를 시작해서 내년 4월에 치러지는 9급 시험에 합격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유군의 어머니도 “좋은 대학에 가려는 게 결국 취업 때문인데, 아이가 재수 대신 공무원으로 취업하겠다고 하니 기특한 생각도 든다”고 했다.

“대학 가도 취업 어려워 일찍 도전”
수시 합격 포기하고 시험 준비도
4년 전부터 수능과목과 비슷해져
학원선 ‘어린 공시생’특별반 운영
19세 미만 9급 합격자도 증가세
전문가 “재수보다 쉽다는 건 오산”

노량진 학원가에 대입 재수 대신 공무원시험을 택하는 고3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갈수록 취업난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대학 진학 후에 또다시 취업 걱정에 시달리느니 일찌감치 공무원 시험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G학원의 박정혁 상담실장은 “상담생 10명 중 3명 이상이 곧 졸업을 앞둔 고3 학생”이라며 “지난해보다 고3 학생들의 상담이 부쩍 늘었다”고 했다. 이들 중엔 대입 수시 모집에 합격한 경우도 있다. 상담 차례를 기다리던 오모(19)양은 “서울의 중위권 대학에 붙었지만 안 가려고 한다. 미래가 불투명한 대학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이 같은 현상은 4년 전인 2013년부터 두드러졌다. 정부가 국어·영어·한국사·행정학·행정법 등 5개 과목이 필수였던 9급 필기시험 과목을 바꾸면서다. 국어·영어·한국사를 필수로 하되 행정학·행정법·사회·과학·수학 중 2개 과목을 선택하도록 했다. 고교 졸업자에게 생소한 행정학이나 행정법 대신 사회와 과학·수학 등 익숙한 과목을 포함시켜 9급 시험의 문턱을 낮춘 것이다. 덕분에 막 고교를 졸업한 연령대인 19세 미만의 지방직 9급 공채 합격자 비율은 2011년 0.03%(2명)에서 2013년 0.5%(60여 명)로 늘었고 2014년에는 1%(140여 명)까지 증가했다. 이런 추세는 국가직 9급 공무원 채용에서도 유사하다.

어린 ‘공시생’이 늘자 학원가도 변화하고 있다. G학원은 3년 전부터 ‘대입 재수 종합반’ 형태로 고3 학생들을 위한 특별반을 운영하고 있다. 오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이어지는 수업과 자율학습 등 학습 스케줄을 챙겨준다. 또 수업에 빠지면 학원에서 벌점을 부과하고 부모에게도 전화로 알린다. 자녀를 특별반에 등록시킨 박모(50·서울 동작구)씨는 “아이가 어려서 걱정이 되는데 생활관리까지 해주니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고3 특별반이 호응을 얻자 인근의 공무원 학원들도 비슷한 유형의 종합반을 구상 중이다.

이에 대해 인사혁신처 김기중 사무관은 “학력·스펙에 관계 없이 공직에 진출할 수 있으면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섣부른 도전과 기대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노량진 P학원의 한 강사는 “영어 실력이 관건인데 수능 2등급 정도의 성적 우수자가 아니라면 2년 내 합격은 매우 힘들다. 재수보다 쉬울 것이란 기대에서 도전해선 안 된다”고 충고했다. 민기 제주대 행정학과 교수는 “9급 공무원의 실무가 고교를 막 졸업한 학생이 당장 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진 않다”고 지적했다.

글=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사진=우상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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