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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도 이탈하고 리라화 30~40% 평가절하 가능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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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호 18면


2017년 유로존의 대격변은 유로화·유럽시장뿐 아니라 한국의 무역·투자에도 도미노 효과를 일으킬 것이다. 유로화와 유럽 단일시장은 지금까지 부분적으로 성공해왔다. 예를 들어 유럽을 찾는 한국 관광객은 유로존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여행 할 수 있다. 유럽 배낭여행자들은 예전에는 독일 마르크, 프랑스 프랑, 이탈리아 리라 등을 챙겨야 했지만 이제는 유로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무역 측면에서도 한국은 유럽연합(EU) 교역 순위 상위 10개국으로 자리잡았다. 한-EU 자유무역협정(FTA)이 6년째로 접어들면서 상품·서비스 무역 규모만 연 1000억 달러(120조원)에 이른다. EU 단일시장은 한국 무역에 상당한 중요성을 갖게 됐다. 이 때문에 유로존 위기로 촉발된 최근 혼란 사태는 한국 경제와 한국 개별 기업에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혼란은 피할 수 없다. 갈수록 벌어지는 북부 유럽과 남부 유럽 국가 간 경제적 격차는 유로존이 지속불가능할 정도의 압력으로 자리잡았다. 인플레이션·실업·재정적자는 남유럽 국가에서 모두 상당한 수준으로 높다. 독일과 나머지 EU 국가의 무역 불균형 현상은 결국 독일에는 엄청난 양의 비축금, 나머지 국가에는 갈수록 팽창하는 재정적자만을 남겼다.

[재정 통합 통한 진정한 단일 화폐는 어려워]


유로화가 없었다면 이탈리아·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들은 급격한 수준의 통화가치 하락을 통해 자국 경제를 균형 상태로 되돌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로존에 구속돼 있는 현 상황은 유럽 각국 지도자에게 옴짝달싹할 정책적 여지도 없게 만들었다. 이들에겐 단 한 가지의 해결책만이 놓여있을 뿐이다. 바로 긴축이다.


정치적·경제적 대혼란 상태인 그리스에서는 몇 주 전 또다시 구제금융이 중단됐다. 포퓰리즘 성향의 치프라스 정부가 긴축 절차를 제대로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올해 이탈리아·프랑스·독일 등 유럽 주요국에서 있을 선거는 포퓰리스트 후보가 정치 전면에 나서는 장이 될 것이다. 이들은 국가주의적 포퓰리즘 정책이 EU 각 국가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민 정책의 정치적 실책에서 비롯된 EU 지역 내 정치적 긴장감은 이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유로화는 지금 지속불가능한 긴장 상태에 접어들었다. 유로존의 미래를 놓고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화폐뿐만이 아닌 완벽한 재정 통합의 길로 들어서 재정·통화 설계를 유로 단일화폐에 맞게 새로 설계하는 길이다. 정치적 문제로 인해 단기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둘째, 유럽 경제가 현재 상황을 그럭저럭 버텨내는 것이다. 사실 이 시나리오는 유로존에서 상당한 경제적 호전이 발생할 때나 가능할 일이다. 셋째, 가장 가능성있는 시나리오는 유로존의 해체다.


올해 유로존에서는 1개 국가 이상이 이탈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관측된다. 이탈리아의 유로존 이탈은 유로화에 타격은 줄 수 있겠으나 치명적인 내상은 입히지 못할 것으로 본다. 펀더멘탈이 약한 몇몇 국가가 탈퇴를 선택한다면 유로존은 오히려 더 안정화될 수 있다. 정책적으로 유연해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유로존 이탈 직후 자국 통화 가치를 30~40% 평가절하할 것이다. 이탈리아 경제에는 매우 바람직한 결과다. 한국 입장에선 이탈리아가 더 매력적인 여행지가 될 뿐더러 이탈리아에서 한국에 수출되는 상품도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유로는 사실 유럽의 정치적 통합체 건설을 위해 도입됐다. 서로 다른 나라의 시민들이 단일 화폐를 사용하게 된다면 상호 우의를 느끼고, 이것이 바로 정치적 통합을 가속할 것이라는 의도였다. 숭고하면서도 다소 이상적인 생각이었다. 지금도 EU는 17조 달러(약 2경 원) 규모의 가공할 만한 경제 공동체다. 세계 순위로는 미국 바로 다음이다. EU는 고유 국기와 국가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재정 통합을 포함한 진정한 단일 화폐를 도입하지 못했다.

[고정환율 약점 보여준 93년 검은 수요일]
유로화는 사실 각기 다른 유럽국가 간 고정환율제 협약에 지나지 않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유로화의 진정한 정체성을 드러내게 했다. 게다가 이 고정환율제는 금융위기 속에서 한심할 정도로 불완전한 구조를 노출했다. 핵심적인 요소인 재정 통합없이 개별 국가별로 각기 다른 규제시스템, 독립적인 중앙은행이 따로 존재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존재하지만 사실상 EU 개별 국가 중앙은행에 종속된 채로 운영돼 왔다.


고정환율제는 다양한 국가에서 종종 사용돼왔지만 경제 위기 시에도 적절하게 작동하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유로화에 앞서 도입된 유럽통화체제(ERM)는 1993년 수치스러운 ‘검은 수요일’로 마침표를 찍었다. ERM 체제에서 마르크화 대비 파운드화 가치를 유지하려 했던 영국은 환율 방어에 나섰지만 하루 만에 33억 파운드를 잃고 소로스에게 굴복했다. 사실 고정환율제는 경제적 위기를 치료하는 해결책 역할보다는 정치적 명분 그 자체로 유지돼왔다. 현재 EU와 유로화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유로를 단일 화폐가 아닌 고정 환율 시스템으로 본다면 현재 유로화가 안고있는 문제의 원인은 좀더 명확해진다. 고정환율이 도입된다면 사람들은 돈을 바꾸지 않고도 휴가를 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국가 간 무역과 투자를 장려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낙관적인 전망은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다.


변동환율제로 인한 불확실성 증대라는 리스크를 탓하는 일은 본질을 꿰뚫지 못한채 엉뚱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환율의 오르내림은 각국 경제의 일반적인 불확실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또 각 개별 국가 경제의 리소스 배분에 있어 중요한 시그널을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정환율제는 이러한 주요 정보가 시장 참여자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는다. 또 자원분배 왜곡 현상을 초래하고 시장 참여자들이 잘못된 시그널에 반응하게 만든다. 그리스가 자신들이 부유하다고 착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참을 수 없는 과잉소비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국에 대한 EU의 직접투자 줄 수도]
한국은 현재 EU에 110억 달러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남부 유럽 국가와의 교역에선 무역 흑자를 기록하고 있지만 북부 유럽 국가와는 적자를 보고 있다. 최근 2년간 원화 대비 유로화의 가치가 20% 가량 하락하면서 한국의 대 EU 적자 역시 커졌다.


유로존 해체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유로화가 점점 더 약세를 띠면서 ‘1달러=1유로’ 패리티(등가)까지 무너질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유로존으로 수출되는 한국 상품의 가격은 비싸질 것이고, 한국에 들어오는 유럽 제품은 저렴해질 것이다. 이런 현상이 한국의 대 EU 무역 적자에 미칠 가능성은 반반이다. 유럽 소비자가 한국 제품에 대한 소비를 줄일 경우 2017년 한국의 대 EU 무역 적자는 더욱 커질 것이다. 그렇지만 유럽 내 한국 제품에 대한 선호도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무역적자는 줄어들 수도 있다.


유로화의 위기는 한국에 대한 EU의 직접 투자를 줄일 것이다. 현재 EU의 직접투자는 430억 달러(약 52조 원)이다. 직접 투자 감소는 한국 경제 전체에는 영향이 적을 수 있겠지만 각 개별 기업에는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국의 대 EU 직접투자는 200억 달러(약 24조 원)이다. 한국 기업들은 자신들의 시장을 다시 분석해보고 투자를 재조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제품은 유로화로 인해 가격이 비싼 반면, 독일 제품은 유로화로 인한 가격 경쟁력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만약 이탈리아가 유로존을 떠난다면 이탈리아 상품의 가격 역시 내려갈 것이고 한국의 수입업자와 관광객들도 이에 따른 이익을 볼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전망이 우울한 것만은 아니다. 세계적인 투자자 존 템플턴 경은 “위기는 곧 기회”라고 말했다. 유로존의 격변이 한국 기업에 예기치 않은 기회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 다만 분명한 건 2017년이 유로화와 EU, 현 체제에 분수령이라는 점이다. 영국에 이은 추가적인 유로존 탈퇴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일과 다름없다. 현재 유로화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조차도 왜소하게 만들 정도로 그 위협은 엄청날 수 있다.


로리 나이트


전 옥스퍼드대 경영대학장옥스퍼드메트리카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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