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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복원을 미래에 둬야하는 시대 전위의 옷을 벗어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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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호 26면


나는 몇 년 전부터 ‘전위는 죽었다’는 주장을 해오고 있다. 이 주장의 근거는 간단하다. ‘앞’보다 ‘뒤’가 중요해진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앞이 계속 중요하다면 전위는 계속 유효하다. 그러나 이젠 앞이 중요하지 않다. 한마디로 앞이 캄캄하다. 그리고 뒤는 허전하다. 캄캄한 앞과 허전한 뒤, 나를 둘러싼 이 불안은 전방위적이다. 앞이 캄캄한 이유는 뒤를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뒤를 챙겨야 한다. 그것이 20세기와 21세기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한자어 ‘전위’로 번역되는 ‘아방-가르드 (avant-garde)’는 아다시피 프랑스어로, 앞을 지킨다는 뜻이다. 원래 군사용어였던 이 말이 정치적, 예술적으로 기존 체제와의 급진적 결별을 꿈꾸는 전복적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 시작한 건 19세기 초였다. 그러다가 1871년의 파리 코뮌 때 중요한 말로 부상했다. 아방-가르드는 시위대 뒷쪽에서 어정거리는 겁 많은 사람들 말고 바리케이드 바로 앞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가장 적극적인 제 1열을 가리킨다. 이런 정치적 아방-가르드가 예술분야로 건너온 것은 20세기 초반이다. 미래파나 다다, 초현실주의 등 전복적인 모더니스트 예술사조 진영에 속한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과정에서 아방-가르드는 열쇠낱말이 되었다. 한마디로 자기가 가장 앞장서서 과거의 예술과 결별하고 예술의 미래, 예술의 ‘앞’을 개척해 나간다는 것이다. 역시 모더니즘의 핵심은 스스로 최첨단의 시간을 살고 있다는 자기의식이다.


그러나 이젠 안녕. 아직도 ‘전위’라는 말이 유효하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전위라는 말처럼 낡아빠진 말도 없다. 그렇다고 예술적인 실험을 그만두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위의 옷을 벗어던지는 순간 더 멋진 새로운 예술적 실험이 가능하다. 그것이 21세기의 예술이다. 그래서 나는 얼마전 앞이 아니라 ‘뒤’를 중요시하자는 의미에서 ‘후위파 선언’을 했다. 물론 아무런 반향도 없었다.


전위가 죽은 원인은 첫째로 시간관의 변화에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미래에 미래의 시간을 놓지 않는다. 대신 미래에 과거를 놓는다. 그것이 지금 가장 힘있는 말 중의 하나인 ‘지속가능한(sustainable)’이라는 형용사의 본질이다. 미래는 새로운 시간이 아니라 과거의 지속이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복원’이라는 말도 그렇다. 사실 내가 자라던 1970년대에는 ‘복원’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은 초가집을 없앴다. 어른들은 ‘초가삼간 다 태워도 빈대잡는 맛’이라는 속담을 인용하며 초가집이 사라져서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아무도 과거를 거들떠 보지 않았다. 그 때의 시간관은 미래에 미래형을 놓는 것이었다. 그것을 우리는 ‘근대화’라 부른다.

[복원이란 미래에 과거형을 갖다 놓는 것]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얼마 전에는 ‘남대문’이 복원되었다. 물론 날림으로. 그것 말고도 복원을 기다리고 있는 과거의 유산이 얼마나 많은가. 복원이란 뭐냐. 미래에다가 과거형을 갖다 놓는 것이다. 몇 년 안가서 ‘4대강 복원’이 반드시 논의될 것이다. 황사와 미세먼지로 망가진 대기도 복원해야 한다. 깨져버릴 대로 깨진 가족관계도 복원해야 한다. 장독대도 복원해야 하고 팽이치기도 복원해야 한다. 심지어 겨울도 복원하고 싶어진다. 꽝꽝 언 한강의 얼음도 복원하고 싶다. 북극을 복원해야 북극곰이 산다. 미래에 과거를 놓지 않으면 인류는 죽는다.


과거로 되돌린다는 사고방식이 본격화된 것은 1970년대다. 미국과 소련은 탈냉전, 이른바 ‘데탕트’의 분위기 속에서 군비 축소에 합의했다. 자기들이 생각해도 스스로 만들어놓은 핵폭탄이 너무 무서웠던 것이다. 초단위로 째깍거리는 핵시계를 과거로 돌려놓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는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띤다. 만들어 놓고 다시 없애자는 허망한 논의를 국제사회가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산한다는 것이고 창조한다는 것이다. 인류를 이끌어온 거대한 수레바퀴다. 사람은 만듦으로서 발전해 왔다. 그러나 이젠 만들면 무서워진다. 2016년 최고의 사건은 ‘알파고’였다. 이세돌의 팬인 나로서는 경악을 금치 못할 사건이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겼다. 돌연 이세돌은 인류를 위해 기계와 싸우는 소년 전사가 되었다. 영화가 현실이 돼버린 것이다. 인류 최초의 사건이었다. 조만간 이세돌보다 훨씬 강한 인공지능 바둑기사를 누구나 휴대폰에 저장해서 가지고 다닐 것이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우리는 인공지능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 만들어 놓고 멸망한다. 간편한 페트병 때문에 바다가 죽는다. 그런데도 자본주의는 계속 생산한다. 이 동력을 어떻게 멈출 것인가가 인류 미래의 핵심이다. ‘어떻게 더 동력을 확대재생산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이 동력을 멈출 것인가’가 인류의 당면 과제다. 과거는 시간적인 ‘뒤’다. 이제부터 미래는 반드시 시간적인 되감기여야 한다. 앞의 앞에 뒤를 놓아야 한다. 이러한 역설적인 시간적 조건에 놓인 21세기는 당연히 전위의 논리를 버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후위파 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나는 앞보다 뒤가 중요하다는 것을 ‘듣기’를 통해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듣기’라는 행위가 왜 뜻깊은지를 말하겠다. ‘듣기’를 ‘보기’와 대조 설명하는 과정에서 ‘시각공간’과 ‘청각공간’의 차이가 드러날 것이다. 보는 일, 즉 시각적인 활동에서 뒤는 중요하지 않다. 보기는 앞의 확보이자 뒤의 포기다. 보기는 180도 조금 넘는 범위의 앞을 계속해서 재구성하고 그 과정에서 뒤를 계속 삭제한다. 반면 듣기는 앞과 뒤를 계속해서 뒤섞는다. 이것을 ‘딜레이 효과’라고 한다. 음파는 한군데 머물러 있지 않고 내 귀를 스쳐 앞으로 가고 다시 뒤로 넘어오고 하면서 공간을 뒤섞는다. 그렇게 ‘울림’을 만들어 낸다. 그 ‘울림’ 자체가 청각의 입장에서는 공간이다. ‘음원’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음원과 울림을 합하면 ‘터울림’이 된다. 듣기는 터울림의 감지다. 터울림은 앞과 뒤를 포함한 ‘공간적 전체성’을 지각하도록 이끈다. 듣기는 터울림의 인식과정, 즉 공간을 잘라내지 않고 전체로 인식하는 과정이다.


터울림은 공간의 몸이다. 그것은 비가시적이지만 공간을 만지도록 해준다. 비가시성은 21세기 예술의 핵심적인 주제가 된다. 전체성이 복원된 공간은 필연적으로 비가시적인 맹점, 철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침묵의 지점’을 포괄하고 있다. 그 비가시적인 침묵의 지점을 드러내는 일이 새로운 예술적 실천의 핵심과제라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해체나 서양식의 도착적 전위가 김빠진 사이다 같이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아무리 잘난 척 해봐야 뒤를 잘라내고 앞만 남기는 단절적 인식과정이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빈 공간의 육체성’이라는 조금은 어려운 단어의 조합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공간 안에 몸을 넣어 놓고 그것을 대상화했다. 그러나 빈 공간 자체가 몸이다. 대상화된 몸이 아니라 빈 공간 자체로서의 몸을 어떻게 지각할 것인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듣기를 통해 그 궁극적 지각의 입구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은 확실하다. 터울림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앉아 듣자, 21세기는 듣기의 시대]
가만히 앉아서 듣자. 눈은, 차라리 감자. 21세기는 듣기의 시대다. 이 말은 물론 청각을 다른 감각보다 우위에 두겠다거나 시각의 중요성을 버리겠다는 뜻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체성, 또는 총체적 관계의 복원이자 재확보다. 소실점을 찍어놓고 공간을 재분할하는 근대적 공간인식은 필연적으로 위계화된 질서를 낳고 그것은 공간의 통합성 보다는 앞 뒤의 해체와 분열을 야기한다. 이러한 인식을 극복하고 보다 통합적인 전체성의 인식에 이르는 과정에서 듣기가 핵심적인 연결고리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연결고리들을 매개로 조화에 이르는 일이다. 현상학자들이 쓰는 말인 이른바 생활세계(lebenswelt)는 문자 그대로 환경,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전체로서의 공간이다. 메롤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몸은 세계를 소유하기 위한 일반적 매체’라고 정의했다.


세계는 ‘즉각적이고도 전체적으로’ 인식되고 그 중심에 몸이 있다. 듣기는 나의 일부이자 나의 바깥이고 나의 배후이기도 하고 내 앞에도 있는, 내 인식 대상이면서 동시에 나를 포괄하고 있는 전체로서의 세계 한 가운데에 있는 몸으로서의 나를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문이다. 다음에는 듣기와 식물성, 듣기와 ‘무작위성’, 즉 ‘랜덤함’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면 좋겠다. 21세기 예술의 퍼즐을 푸는 핵심 열쇠들이다.


성기완계원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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