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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서 노제지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영결식=상오 7시10분부터 윤교목실장의 집례로 연대본관앞에서 유가족·김영삼·김대중·문익환씨·안세희총장등 각계인사·교직원·시민·학생등 5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2시간30분 동안 진행됐다.
영결예배는 묵념·지선스님의 식사, 고 김세진군의 어머니 김순정씨의 기도, 서클선배인 이민우군 (23·경영3)의 약력 소개, 오충일목사의 설교, 시인 고은씨의「그대 가는가, 어딜 가는가」라는 조시낭독, 교수대표 오세철교수·동문대표 박승원신부·시민대표 백기완씨·학생대표 우상호 연대총학생회장·양심수대표 문익환민통련의장의 조사가 있었다.
오교수는 조사에서 『이군을 죽인 것은 최루탄파편이 아니라 이군이 희생된 뒤 반나절도 되지 않아 최루탄을 쏘아대는 이 정권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고 말했고 박신부는『이군은 이제 이 땅의 염원인 민주화를 위한 밀알이 되었다』 고 말했다.
이어 9시30분쯤 이군이 쓰러진 교문앞에서 서울대 이애주 교수가 「한풀이 춤」을 펼쳐 이군의 마지막길을 애도했다.
◇운구행렬=대형영정·3백여개의 만장을 앞세운 이군의 꽃상여는 상오10시쯤 교문을 빠져나와 신촌로터리에 도착, 노제를 지낸뒤 아현 고가도로∼서소문∼서울 시청∼을지로∼한남대교까지 차량행진을 가졌다.
차량행진은 유가족이 탄 영구차· 장례위원·학생대표등이 탄 차가 1백여대나 이어졌으며 4만여 시민· 학생들이 뒤를 따랐다.
◇묘지=이한열군의 묘지는5·18광주사태 희생자가 안장된 곳에서 7백여m 떨어진 동남향의 광주시 망월동 시립공원묘지 6묘원.
이군 아버지 이병섭씨의 위임을 받고 서울에서 내려간 당숙 이정재씨 (65·전남곡성군) 와 연세대시설과강 윤광수씨는 광주시청등 유관기관과 장지문제를 협의, 시조례상 기당 1.5평으로 규정돼있는 묘소넓이를 유족과 묘원측의 합의에 따라 9평으로 결정했다.
이군의 당숙은 석관을 쓰기로하고 길이 6.5척(1백97cm) 높이 1.2척(36.5cm)의 석관을 주문.
묘원측은 8일 하오부터 묘소정리에 들어가 떼를 떠내고 당을 고르는 작업을 했으며 묘소 주변에 나무를 심었다.
광주시북구청도 묘지 진입로를 정비했다.
◇시청앞=상오 11시30분쯤 이군의 영정을 앞세운 선도차가 서울 시청앞에 도착하자 미리 시청앞 도로에 나와있던 시민들은 박수로 상여를 맞았다.
11시40분쯤 운구대열이 대부분 시청앞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대한성공회 종탑에서 조종이 울려 엄숙한 분위기속에 묵념행사가 있었다.
영구차와 차량행렬이 11시50분쯤 을지로 목으로 빠져나가자 뒤따르던 시민·학생들은 시청앞 광장에 1백여개의 만장을 들고 연좌, 노상추도회를 가졌다.
상오11시50분쯤 운구차량을 을지로 목으로 보낸 학생·시민들은 시청앞 광장을 가득 메우고 연좌, 『질서』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하고「우리의 소원」 등 노래를 불렀다.
이들중 일부 시민들은 시청옥상에 게양한 국기를 반기로 바꿀것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일부 민민투학생들은 낮12시10분쯤 덕수궁앞길에서 스크럼을 짜고 「제헌민중의회쟁취」 등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청앞 시위본대에 합류하기도 했으며 해고근로자 3백여명이 「노동3권보장」 「해고자전원복직」 등 플래카드· 피킷 10여개를 앞세우고 시위대에 합류, 박수를 받았다.
◇추모인파=신촌 로터리에서 노제가 진행되는 동안 차도와 주변인도를 완전히 메운 학생· 시민들은 앞사람에 시야가 가려 잘 보이지 않자 인근건물옥상·지하철역사 지붕위· 가로수· 전신주에까지 올라가 지켜봤다.
이들은 노제가 끝난뒤 운구행렬이 시청쪽으로 움직이자 메웠던 차도의 길을 터 행렬이 지나갈 수 있도록 한뒤 뒤를 따르며『한열이를 살려내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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