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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이 ‘불통법’ 안 되게 하는 건 관료들의 몫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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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호 2 면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관계 절벽’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불필요한 오해를 사거나 꼬투리 잡힐 빌미를 줄까 싶어 아예 업무 관계자나 민원인과의 대면과 접촉을 기피하는 등 관료 사회의 몸 사리기가 확연하다.


1만5000여 명의 공무원이 상주하는 세종시의 풍경은 공직자들의 몸조심 분위기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하게 한다. 공무원들이 주 고객인 세종시 정부청사 맞은편 상가 ‘세종1번가’의 식당 업주들은 김영란법 시행 이후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하소연했다. 평소 점심시간 땐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해 계단으로 오르내려야 할 정도로 북적대던 곳인데 요 며칠 새 공무원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방이 11개 있다는 한 일식집의 직원은 지난달 29일 본지 취재진에게 “보통 점심·저녁 가리지 않고 11개 방의 예약이 꽉 찼는데 오늘은 예약이 세 팀밖에 없다”고 했다. 반면 세종청사의 구내식당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공무원들이 외부 약속을 취소하고 대거 구내식당으로 몰려든 탓이다. 테이블 곳곳에선 “시범 케이스로 찍힐까 봐 점심 약속을 취소하고 구내식당으로 왔다”는 대화가 흘러나왔다. 서울의 관가 분위기도 다르지 않다. 지난달 30일 고위 공직자들이 즐겨 찾던 서울청사 근처의 유명 한정식엔 예약이 대거 취소되는 바람에 8개의 방 중 2개 방에만 손님이 들었다.


경제부처의 한 장관은 아예 오찬·만찬을 해야 하는 행사는 모조리 불참을 통보하고 부내 직원들과 식사 일정을 잡고 있다고 한다. 다른 경제부처 소속의 한 관료는 “외부인과의 약속을 거의 안 잡고 있다”며 “권익위 콜센터에 건마다 전화해서 확인하기도 그렇고, 콜센터 직원에게 내 인생을 맡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서로 몸조심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하면서 공직자들의 골프 약속이나 이런저런 행사·모임도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고 한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아예 기자나 민간인을 당분간 안 만나야 시범 케이스에 안 걸린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관료들이 대중식당이나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걸 탓할 이유는 없다. 관료들이 스스로 ‘접대성 모임’을 회피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관료 사회의 접대문화와 관행이 바뀌지 않고는 우리 사회가 투명한 선진 사회로 진입하지 못할 것이다. 또 김영란법 시행 초기, 불법과 관행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가를 똑 부러진 매뉴얼이 정착되지 않아 혼란이 가중된 측면이 있기 때문에 식당의 ‘예약절벽’ 사태는 일시적 현상에 그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영란법 시행을 빌미로 그렇지 않아도 만연해 있는 관료 사회의 복지부동(伏地不動) 풍조가 더 확산되는 쪽으로 흘러가선 곤란하다. ‘오대수(오늘만 대충 수습하자)’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을 정도로 이미 관료 사회의 땜질식 ‘면피 행정’과 민심과 동떨어진 ‘불통 행정’은 도를 넘고 있다. 지난여름의 전기료 누진세 파동이나 미세먼지 대책 등에서 눈으로 확인한 바 있지 않은가.


가뜩이나 정부 부처 이전으로 세종시는 ‘관료들만의 섬’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터다. 공무원과 국민들 간 소통의 단절로 인한 폐해가 커져가고 있는 마당에 김영란법 시행으로 기업인·민원인 간의 정상적인 대면과 접촉까지 끊어지는 ‘관계 절벽’이 더해진다면 부작용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현실과 괴리된 탁상행정은 국민 생활의 불편을 가져오는 것은 물론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입게 될 것이다.


김영란법 제정의 근본 취지는 ‘접대 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자면 정부 부처와 힘 있는 권력기관이 틀어쥐고 있는 규제를 과감히 풀어줘 접대 없이도 시장의 질서가 잘 작동되도록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러려면 관료들이 이전보다 더 많이 시장 참여자들과 접촉·대면해야 하는데, 김영란법을 빌미로 오히려 불통 풍조가 만연한다면 목욕물을 버리면서 어린애까지 버리는 오류를 범하는 일이 될 것이다.


중앙 부처의 한 과장은 본지 취재진에게 “세종에 내려오고 나서 사무관급 젊은 공무원들은 이미 외부인을 잘 못 만나왔는데 이젠 직급을 가리지 않고 그렇게 되는 분위기”라며 “같은 공무원끼리도 부탁하고 부탁받는 입장이 돼버려 외부인은 물론이고 공무원끼리도 벽이 더 생길 것 같다”고 걱정했다. 이런 우려가 현실이 돼 더 큰 재앙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건 정부와 관료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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