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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면 슈베르트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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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3호 27면

러시아 출신의 이색적인 피아니스트 발레리 아파나시예프(42).

장마가 머지 않았다. 이 무렵이 되면 기억 속에서 선명한 이미지 하나가 떠오른다. 비에 젖은 숲에 대한 것이다.


그날 나는 숲 속에 있었다. 땅에서는 이미 비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해 장마를 알리는 첫 번째 비였다. 하던 일을 멈추고 서둘러 산에서 내려가기로 했다. 그 때였다. 숲이 모습을 바꾸고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구름은 평소보다 묵직했고 하늘은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물소리도 크게 들렸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나무들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며 접신한 무당처럼 웅웅웅 울음소리를 냈다. 바람이 늘 한 방향으로 부는 줄 알았는데 숲의 나무들은 여러 갈래로 흔들렸다. 무섭다기보다는 신비로웠다. 무심하게 바라보던 숲의 풍광이 모두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빗방울을 맞으며 숲길에서 슈베르트를 듣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21번 D.960.


슈베르트의 피아노곡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즉흥곡이나 춤곡같이 멜로디가 또렷하고 이미지가 선명한 소곡들과 피아노 소나타들이다. 그는 미완성 작품을 포함해 모두 23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다. 쇼팽과 브람스가 모두 3곡씩 남긴 데 비하면 많은 편이다. 그 중 베토벤의 영향을 받은 세 개의 마지막 소나타는 규모와 인기 면에서 독보적이다. 마지막 작품 D.960은 연주하는데 40여 분이 걸린다. 베토벤의 가장 규모가 큰 피아노 소나타 ‘함머클라비어’보다 조금 짧고, 교향곡 5번과는 비슷하거나 더 길다. 교향곡 수준의 피아노 소나타인 셈이다.


피아노 소나타 D.960은 유작이다. 출판업자 디아벨리에 의해 출간되었으나 큰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베토벤의 작품과 비교되면서 덩치만 크고 속은 빈 작품으로 취급받았다. 그런데 20세기 들어와서 유명 연주자들과 학자들이 이 곡에 단비를 뿌렸다. 슈베르트와 베토벤의 연주와 감상에 다른 미학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운 것이다. 베토벤이 구조를 쌓아 작품을 만드는 건축가라면, 슈베르트는 낭만적 서정을 무한히 확장하는 방랑자였던 셈이다.


하지만 나는 슈베르트가 방랑자 이미지로만 남아있는 것에 다소간 불만이 있다. 낭만주의 시대의 방랑자는 고립되어 내적으로 소진된 아웃사이더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베토벤처럼 고전에서 낭만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었다. 슈베르트의 음악은 비나 물의 이미지와 가깝다. 특정한 방향이 없는 듯 보이지만 내적인 원리에 따라 순환한다. 때로는 거친 물살처럼 바위에 부딪히며 숨겨진 힘을 보여주기도 하고, 안개처럼 산허리를 감싸 안기도 한다. 그것은 늘 죽음의 그림자를 지고 다니는 가망 없는 연약함이 아니라 생의 비밀을 감내하는 부드러운 내적 투쟁이다.


피아노 소나타 D.960에서 슈베르트는 베토벤처럼 모티브를 확장한다거나 대위법에 의존하기보다는 조를 바꾼다거나 반음계를 자연스럽게 활용한다. 또 화성을 변화시켜가면서 음악의 물길을 이리저리 바꾸어나간다. 종종 긴 쉼표를 찍으며, 제자리에서 맴도는 침묵의 나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가장 물기를 많이 머금고 있는 연주는 ECM레이블에서 나온 발레리 아파나시예프의 로켄하우스 실황 녹음이다. 그는 국내에서는 그리 인기가 높지 않다. 이 연주에 대한 평가도 호불호가 나뉜다. 너무 느리다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이런 개성 때문에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자기 색깔과 철학, 설득력이 있다.


1악장에서 그의 연주는 묵직하다. 유명한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의 녹음보다 더 느린 보폭으로 시작된다. 제1주제가 끝나고 등장하는 저음 트릴은 심연까지 닿는 천둥 소리 같다. 음악사에 가장 유명한 트릴이라는 말을 입증해주는 연주다.


또한 눈여겨 볼 것은 저음의 트릴이 끝나고 난 뒤의 침묵이다. 음이 사라진다. 하나 둘 셋 넷…. 좋은 연주자는 쉼표를 잘 연주해야 한다고 했던가? 아파나시예프가 연주하는 쉼표는 구름이 몰고 온 바람이 순간 멈춘 것 같은 정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후두둑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며 주제 선율이 반복된다. 안도감이 느껴진다.


2악장은 베토벤 후기 소나타의 느린 악장을 연상시킬 만큼 깊은 울림이 있다. 주로 피아노와 피아니시모로 연주되는 느린 악장에서 아파나시예프는 산허리를 감싸는 안개처럼 연주한다. 그 안에 생의 비밀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마저 들게 한다. 만일 당신이 비 오는 창가에 서 있다면 하루 종일 들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올해도 장마가 시작되면 나는 슈베르트를 들을 것이다. 그리고 책 한 권을 사서 책머리에 ‘비가 많은 계절에 젊어서 세상을 떠난 슈베르트를 듣는다’고 쓸 작정이다. ●


글 엄상준 KNN 방송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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