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0년간 12경기만 쉬었다…희정아, 잘 참아줘 고마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프로 20년차 주희정은 국내 프로농구 첫 1000경기 출전을 앞두고 있다. 큰 부상을 네 차례나 당하고도 피나는 자기 관리로 불혹을 앞둔 현재까지 코트를 누빈다. 올 시즌 식스맨으로 뛰고 있는 그는 “1분 1초가 소중하다. 모든 걸 코트에 쏟아붓겠다”고 말했다. [용인=김민규 기자]

프로 20년차 주희정은 국내 프로농구 첫 1000경기 출전을 앞두고 있다. 큰 부상을 네 차례나 당하고도 피나는 자기 관리로 불혹을 앞둔 현재까지 코트를 누빈다. 올 시즌 식스맨으로 뛰고 있는 그는 “1분 1초가 소중하다. 모든 걸 코트에 쏟아붓겠다”고 말했다. [용인=김민규 기자]

안녕하세요. 프로농구 서울 삼성의 가드 주희정(39)입니다. 어느덧 프로농구 20년차인데 국내 최초로 프로농구 1000경기 출전을 눈 앞에 두고 있어요. 지금까지 998경기에 출전했으니 21일 오리온과의 경기와 23일 KGC인삼공사 전에 출전하면 기록을 달성합니다.

1000경기 출전 앞둔 주희정
구멍가게 하며 키워주신 할머니
약값 벌러 대학중퇴 뒤 프로 입단
매일 이 악물고 500개 슛 연습
다행히 아직 틀니는 안 끼었네요
네번의 수술, 주전 밀린 박탈감
아이들 보며 은퇴 위기 넘겨

1997년 프로농구 원년 연습생으로 나래(동부의 전신)에 입단해 20년간 제가 결장한 경기는 단 12경기 뿐이었어요. 통산 출전경기 2위 추승균 KCC 감독님(738경기)보다 260경기를 더 뛰어 당분간 깨지기 힘든 기록이라고 하더군요.

일반회사를 20년 다녔다면 장기 근속상을 받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코트에서 20대 젊은 선수들과 경쟁하다보니 여기까지 달려왔네요. 제 전성기 때 최고 인기가수가 H.O.T였어요. 동기 조동현(40)은 부산 kt 감독이 됐고, 후배 이규섭(39)은 우리 팀 코치를 맡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거울에 비친 제게 물었어요. “희정아. 다시 태어나서 농구를 한다면 1000경기에 출전할 수 있을까. 그동안 잘 참아줘서 고맙다.”

제가 이렇게 오래 버틴 게 놀랍나요? 사실 저도 놀랍습니다. 득점·리바운드보다 제게는 출전 기록이 더 자랑스럽습니다. 재능이 아닌 의지로 만든 기록이기 때문이지요.

할머니(김한옥 씨)가 부산에서 홀로 구멍가게를 운영하시면서 절 키웠죠. 버스 회수권을 살 돈이 없어서 2시간을 걸어서 통학한 날도 있어요. 친구들이 부모님 손을 잡고 놀이공원에 갈 때 전 할머니를 생각하며 죽기살기로 농구를 했어요. 어느 날 할머니의 병환이 악화돼 약값을 벌어야 했어요. 고려대 2학년을 중퇴하고 자동차 기술을 배울까했는데 다행히 연습생으로 프로에서 뛸 기회를 잡았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노력 밖에 없었습니다. 고교 시절엔 전속력으로 뛰어 콘크리트 벽에 어깨를 부딪히는 훈련을 했어요. 체구가 왜소해서 몸싸움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였죠. 프로에 와서도 슛 훈련을 하루에 500개씩 했어요. 지금까지 150만개는 넘게 슛을 쏜 것 같네요. 후배가 ‘그렇게 이를 악물고 운동을 하면 마흔 살도 되기 전에 이가 다 빠지겠다”고 걱정하기도 했죠. 이제 마흔 살이 되었는데 아직 틀니는 끼지 않았네요. 하하.

행운은 노력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1997~98시즌 신인왕에 올랐고, 2001~02시즌 삼성의 통합 우승을 이끌며 챔피언결정전 최우수선수(MVP)상을 받았어요. KT&G 시절인 2008~09시즌엔 사상 최초로 6강 플레이오프 탈락팀 선수로서 정규리그 MVP를 차지했지요.

어떤 이는 저를 ‘철인(鐵人)’ 이라고 하지만 그건 결과만 봤기 때문입니다. 전 이제까지 네 차례나 큰 부상을 당했어요. 2000년 어깨, 2004년 목, 2006년 손과 양쪽 무릎 수술을 했죠. 결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시즌이 끝난 뒤 수술 일정을 잡았을 뿐입니다. 은퇴 고비도 세 차례나 넘겼어요. 대학교를 중퇴할 때, 무릎 수술을 받았을 때, SK에서 주전경쟁에서 밀렸을 때 은퇴를 생각했지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버텼어요. 한때 제가 ‘날쌘돌이’라고 불렸던 걸 아세요? 다 지난 얘기입니다. 요샌 ‘아재(아저씨) 가드’로 통해요.

할머니는 2002년 세상을 떠나셨어요. 요즘도 경기 전 애국가가 울리면 할머니에게 “꼭 이기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얼마 전 할머니의 유골을 뿌려드린 부산의 한 공원을 다녀왔어요. “손자가 1000번째 경기에 출전하는 걸 지켜봐달라”고 말씀드렸죠.

요즘 제 곁엔 사랑하는 아내(박서인·38)와 세 딸(서희·서정·서우), 그리고 아들(지우)이 있답니다. 아이들은 아빠가 운동할 때가 가장 멋지대요. 할머니께 부끄럽지 않은 손자가 되고 싶었던 것처럼 이젠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어요. 철저한 몸 관리를 통해 적잖은 나이에도 맹활약을 펼치는 프로야구 이승엽(40·삼성) 선수와 프로축구 이동국(37·전북) 선수가 참 보기 좋습니다.

저는 지난 시즌까지는 주전이었지만 올 시즌엔 식스맨으로 뛰고 있습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이 1분이든, 1초든 전 모든 걸 코트에 쏟아붓고 싶어요.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면서요. 그게 가장 주희정다운 플레이라고 생각합니다.

삼성 구단이 1000번째 경기를 기념하기 위해 캐릭터 티셔츠를 제작해 1000원에 판매한다고 합니다. 수익금은 소아암센터에 기증하고요. 1000번째 경기를 치르면 어떨 것 같냐고요? 특별할 건 없어요. 늘 그랬던 것처럼 1001번째 경기를 준비할 겁니다. 전 오늘만 보고 살아요. 지금까지 제가 버텨온 비결입니다.

용인=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사진=김민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