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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곳 없는 사막전 같은 반도체 시장 쟁탈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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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호 21면

1 1941년 11월 27일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불타는 독일군 4호 전차 옆을 지나는 영국군 크루세이더 전차. 숨을 곳도, 피할 곳도 없는 사막에서의 전투는 한번 밀리면 끝없이 패주하는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전개로 이어졌다.[사진 Imperial War Museums]

무능한 동업자는 인턴만도 못한 법이다. 2차대전 때 독일 입장에서 이탈리아가 그런 존재였다. 전쟁 이전 이탈리아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소중한 정치적 동맹이었다. 그런데 이탈리아 총통 베니토 무솔리니는 정치는 몰라도 전쟁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이탈리아는 사사건건 독일의 발목을 잡는 애물단지가 됐다.

이탈리아군의 형편 없는 실력은 1935년 이디오피아 침공 때부터 드러난 바 있었다. 아프리카 식민지를 확장한다며 대륙 유일의 독립국인 이디오피아를 침공했지만 총도 제대로 없는 이디오피아군에게 갖은 애를 먹었다. 1939년 4월엔 발칸반도에 있는 소국 알바니아를 침공해 병합했지만 이런 전쟁을 통해 분명해진 건 이탈리아군의 사기와 장비 모두 유럽 국가와 전쟁을 할만한 상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를 알았기에 무솔리니는 1939년 9월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에 가담하지 않았다.

[롬멜, 토브룩 점령하고 이집트로 진격]

2 1941년 초 리비아에서 반격을 준비하는 롬멜(왼쪽에서 네번째).

그런데 독일군은 6주 만에 폴란드를 석권해버렸다. 다음해 5월엔 독일의 프랑스 침공이 시작됐다. 프랑스와의 국경에 웅크린 70만 이탈리아군은 눈치만 봤다. 6월이 되자 프랑스군의 붕괴와 항복이 거의 확실해졌다. 무솔리니는 승전국의 대열에 끼지 못할까 불안해졌다. 6월 10일 급히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21일 군대를 프랑스 영토로 진군시켰다. 이에 맞서는 프랑스군은 마지노선에 의지한 15만 명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탈리아군은 졸전을 거듭했다. 6월 24일 프랑스 항복 때 이탈리아군 중 가장 앞선 부대는 기껏 국경에서 8㎞ 진격한 상태였다. 프랑스의 병력 손실이 200명도 안되는 데 비해 이탈리아군은 1200명 이상이 죽거나 실종됐다.


그래도 무솔리니의 욕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북아프리카에서 히틀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사고를 쳤다. 당시 이탈리아 식민지였던 리비아에는 25만 명의 이탈리아군이 주둔 중이었다. 바로 옆 이집트는 3만 명 남짓한 영국군이 지키고 있었다. 무솔리니는 영국마저 독일에 굴복할까봐 안달이 났다. 1940년 6월 현지 총사령관 그라치아니 원수에게 ‘이집트 원정’을 명령했다. 그라치아니는 마지 못해 느릿느릿 전진을 시작했다. 유일한 이동로인 해안도로를 따라 트럭 대신 노새로 대포를 끌고 행군했다. 석 달간 130㎞를 진격해 시디 바라니에 진지를 구축했다. 12월 잔뜩 도사리고 있던 영국군이 반격에 나섰다. 기세를 꺾으려는 제한적인 공격이었지만 이탈리아군은 순식간에 와해돼 패주했다. 영국 중동군 사령관 아치볼드 웨이벌 경은 예정에 없던 추격에 나섰다. 영국군은 요새화된 항구 바르디아에 이어 전략 요충지 토브룩까지 10주만에 800㎞를 내달렸다. 이탈리아군은 거의 모든 장비와 13만명의 포로를 뒤에 남기고 트리폴리까지 달아났다.


뒷감당은 히틀러 몫이 됐다. 트리폴리까지 넘어가면 북아프리카 전체를 포기해야 했다. 그러면 이탈리아와 남부 유럽이 연합군의 공군과 해군의 위협에 노출된다. 할 수 없이 그는 소련 침공에 투입하려던 소수의 기갑사단을 파견키로 했다. 지휘관엔 에르빈 롬멜을 임명했다. 전형적인 현장 지휘관인 그는 2월 12일 도착하자마자 상황을 파악했다. 영국군은 보급선이 이집트에서 튀니지 근처까지 늘어져 보급이 취약했다. 1941년 3월 24일 롬멜은 1개 사단도 안 되는 병력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제대로 허를 찔린 영국군은 베다 폼의 전선기지를 내주고 벵가지를 지나 토브룩까지 도망쳤다. 석 달 전 영국군이 10주간 진격했던 거리를 독일군은 불과 1주일 만에 내달렸다. 롬멜은 토브룩을 포위하는 한편 리비아와 이집트 국경 근처의 카푸초 요새와 할파야 고개까지 점령했다. 독일의 여러 유능한 장군 중 한 명이었던 롬멜은 이제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을 얻고 전국적 스타로 부상했다.

[몽고메리, 병력·장비 모아 2000㎞ 반격]
하지만 독일군의 취약한 전력이 발목을 잡았다. 그의 휘하에 있는 ‘독일 아프리카군단’은 2개 기갑사단과 1개 경사단 뿐이었다. 이탈리아군을 앞세워 토브룩을 공략했지만 요새화된 토브룩은 해상보급을 받으며 포위를 버텨냈다. 이 사이 전력을 재정비한 영국군이 반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독일군은 88㎜ 대공포를 끌고나와 영국군의 마틸다·크루세이더 전차를 박살내버렸다. 영국군 사령관이 인도지역 총사령관 클로드 오킨렉으로 교체됐다. 그는 철저히 물량전을 준비했다. 사막공군을 창설하고 호주 등 영연방 동맹군으로 병력을 확충했다. 롬멜이 “왜 하늘에 영국기 뿐이냐”고 불평하기 시작한 게 이 즈음이다.


11월 영국의 ‘크루세이더’ 작전이 개시됐다. 독일군은 선전했지만 영국의 물량을 버텨내기 힘들었다. 롬멜은 토브룩과 벵가지보다 한참 후방인 엘 아게일라까지 물러났지만 타고난 전사인 그는 곧바로 반격을 구상했다. 사막전은 보급 싸움이다. 생존과 전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본국에서 실어와야 한다. 이런 조건에선 전력이 비슷한 두 군대가 맞붙으면 이길수록 불리해지는 역설이 생긴다. 짧아진 보급선으로 기력을 회복한 독일군은 1942년 1월 반격에 나섰다. 예상 못한 영국군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벵가지·토브룩을 거쳐 이집트 영내로 한참 들어간 엘 알라메인까지 패주했다. 또다시 포위된 토브룩도 6월 함락됐다.


영국은 다시 사령관을 교체했다. 고집 세지만 유능한 버나드 몽고메리였다. 그는 겁쟁이라는 비판에 귀를 막고 방어에만 전념했다. 미국이 지원한 스튜어트와 그랜트·셔먼 전차를 차곡차곡 모았다. 독일보다 두배 많은 20만 병력과 1000대의 전차를 보유한 10월 24일, 영국군은 드디어 엘 알라메인에서 공세를 개시했다. 사막 기후에 건강이 나빠진 롬멜이 하필 본국으로 요양가 있는 시점이었다. 밀고 밀리던 전투는 며칠만에 영국군의 승리로 기울어졌다. 히틀러가 “버티라”고 윽박질렀지만 롬멜은 미련없이 후퇴했다. 엘 알라메인 전투와 거의 동시에 아프리카 반대편인 프랑스령 모로코와 알제리에 연합군 10여 명이 상륙했다. 트리폴리까지 신속하게 후퇴해 튀니지라도 지키는 게 현명했다. 2000㎞에 달하는 거리를 독일군은 질서 있게 퇴각했다.


독일군은 튀니지에서 6개월을 더 버텼지만 북아프리카는 추축국에게 줄곧 부담이자 손해인 전장이었다. 괜한 싸움을 벌여 독일군의 전력을 분산시켰다. 전투 자체는 극적이었다. 바다와 같은 사막에서 한번 싸움으로 수백㎞를 전진하고 후퇴했다. 산과 강이 조밀한 유럽과 달리 사막전에선 방어에 쓸만한 지형지물이 없었다. 작은 전력 차이가 결과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는 전투가 북아프리카에서 펼쳐진 사막전이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감수한 SK의 성공]

SK하이닉스 이천 공장의 반도체 생산라인.

순식간에 승부가 갈리고 한번 밀리면 끝없이 추락하는 것은 메모리 반도체 제조업체의 숙명이다. 생산라인 하나를 건설하는데 조 단위의 투자가 필요하고, 시장이 좋을 때는 30~40%의 이익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공급 과잉이나 수요 부족으로 치킨 게임이 시작되면 팔면 팔수록 손실이 늘어나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다. 실제로 2007년부터 2년간 D램 분야의 치킨 게임이 벌어지는 중이던 2007년 4분기에 대만 파워칩은 134억 대만달러의 매출에 110억 대만달러의 손실을 내 영업손실률이 82%에 달했다. 결국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승리하면서 점유율 5위였던 독일 키몬다가 파산했다. 4년 후인 2010년 대만과 일본 기업들이 증산에 나서면서 시작된 제2차 치킨 게임도 세계 3위 메모리 업체였던 일본 엘피다가 2012년 2월 부도를 내면서 일단락됐다.


1988년 현대전자에서 출발한 하이닉스는 외환위기 이후 ‘빅딜’을 통해 LG반도체를 합병하며 2001년 메모리 반도체 전문업체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자금력의 열세로 새 라인을 깔지 못한 채 기존 라인의 개량을 통한 생산성 향상만으로 치킨 게임을 견뎌야 했다. 2차 치킨 게임이 벌어지는 중 매각 작업이 시작됐지만 뿌리였던 현대그룹과 LG그룹은 차례로 인수를 포기했다. 결국 SK그룹이 STX를 제치고 하이닉스의 새 주인이 됐다.


3조4000억원에 사들인 SK하이닉스는 SK그룹의 효자가 됐다. 그룹 매출 가운데 수출의 비중이 급등하면서 내수기업이라는 꼬리표를 떼냈을 뿐 아니라 마침 치킨 게임이 마무리되면서 하이닉스가 2013년 3조4000억원, 2014년 5조1000억원, 2015년 5조3000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둔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스마트폰 분야에 대한 대응에 실패한 LG그룹이 위험도 높은 반도체 산업 진출을 망설이는 사이 SK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확보한 셈이다. 올들어 반도체 경기가 위축되면서 하이닉스의 영업이익률은 10% 대로 낮아졌지만 여전히 견조한 실적을 유지하고 있으며 올해에만 총 6조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한번 밀리면 수천㎞를 물러나야 하는 사막전처럼 메모리 반도체 사업은 위험부담이 크다. 그만큼 성공했을 때의 과실도 달콤하다. SK텔레콤이라는 든든한 우군의 지원과 어려움을 극복하며 쌓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하이닉스의 최근 행보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전형적인 성공 사례다.


나현철 논설위원tigera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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