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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작가 출신 감독의 의중 생생 구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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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호 24면

문정희 ⓒ민관김 스튜디오

‘영화의 흥행은 어쩌면 제목이 운명 짓는다’는 말은 결코 다 맞는 얘기가 아니다.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기획 단계부터 한국 사회에 판도라의 상자를 열 것이라고 봤다. 그래서 흥행이 폭발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패러디물 ‘관도라’가 나올 정도의 시국이 되고 말았다. ‘판도라’가 세상의 판도라를 열려고 하는 순간 ‘관도라’가 다른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버린 셈이다. 개봉 둘째 주가 지나는 15일 현재 관객 수는 200만 명을 넘어 섰다. 물론 나쁘지는 않다. 아마도 600~650만명은 모을 것이다. 당초 천만 관객을 기대했다는 것이 다소 뼈아플 뿐이다. 영화가 세상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영화를 망친다.

감독 박정우

‘재난’ 대신 사람들 이야기가 주인공
세상 풍진(風塵)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럴 때의 영화는 그냥 영화 자체로 말할 수밖에 없다. 영화의 안만 들여다 보면 ‘판도라’는(47)의 민첩함과 영민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제 한국도 단순한 반핵(反核) 대열에서 벗어나야 할 때라는 목소리가 높다. 탈핵(脫核)의 시대로 가야 한다는 것이고 거기 동참하는 사회운동가·정치인·문화예술가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박정우는 바로 그 지점과 시기를 가장 적절하고 또 가장 빠르게 포착해 냈다. 원전의 가공할 위험성을 얘기하는 영화가 2, 3년 전에 개봉됐으면 너무 빨랐을 것이다. 반대로 2, 3년 후에 개봉됐으면 너무 늦는 게 될 것이다. 이 영화는 무려 4년 전에 기획됐다. 촬영을 다 끝낸 게 1년 반 전이다. 그런데 개봉 시기를 저울질 했다. 그렇게 ‘정치사회적 판단’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2016년 현재의 개봉 시기는 매우 시의적절한 판단이었다. 단,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영화 ‘판도라’

한편으로 박정우가 영리하다는 것은 이 영화의 구조를 디자인한 방식 때문이다. 이 영화가 아무리 원전=탈핵이라는 거대한 담론과 정치사회적 아젠다를 지니고 있다 한들 외형상으로는 재난 블록버스터다. 제작비만 백 수십 억원을 쏟아 부었다. ‘장사’를 위해서라면 볼 거리의 쾌감을 무시할 수가 없다. 어차피 CG물량이 어마어마할 것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영화가 재난의 비주얼을 내세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봤다.


근데 박정우의 선택은 달랐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판도라’는 원자력 발전소의 붕괴라는 전대미문의 재난상황 자체가 주인공인 영화가 아니다. ‘타워링’같은 할리우드 원전(元典)부터 ‘타워’같은 한국 영화까지 재난 블록버스터의 주인공은 대개 ‘재난’ 그 자체였다.


그런데 ‘판도라’는 그 예상을 보란 듯 뒤집는다. 사람들의 촘촘한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다. 불가항력의 천재(天災)와 기가 찰 인재(人災) 앞에 놓인 사람들의 절망과 희망, 그 사이에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를 줄줄이, 그것도 비교적 균등하고 균질하게 엮어내려 애쓴다. 특정한 주인공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야말로 ‘판도라’의 특징이다.


그건 박정우가 오랜 경력의 시나리오 작가 출신의 감독이라는 점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주 이른 나이부터 대본을 썼다. 1994년 장길수 감독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에서 시작해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선물’ ‘라이터를 켜라’ ‘광복절 특사’ 등 1990년대를 관통하며 2000년대 초까지 그는 영화계 한 켠의 마이더스의 손이었다.


2004년 ‘바람의 전설’부터 각본과 연출을 같이 하기 시작했지만 흥행 파워는 작가 때만 못했다. 2006년 ‘쏜다’의 실패 후 2012년 ‘연가시’로 절치부심 끝에 재기에 성공하기까지 감독으로서는 다소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이야기꾼 출신의 감독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장점이 이번 영화에서야 절정을 맞이한 셈이다.

아름답기 보다 인간답게 보이는 연기 내공

‘판도라’에 주인공이 없는 것처럼 그려진다지만(물론 김남길이 주요 배역이긴 하다. 그러나 그도 여타의 영화 속 주인공과는 다르게 그려진다) 박정우의 연출에 호흡과 리듬을 가장 완벽하게 탄 인물은 극중 며느리인 정혜, 곧 문정희(40)다. 그녀는 이번 영화에서 신들린 연기가 아니라 신을 잘 알고 있는 듯한 연기를 해냈다. 영화에서 신은 곧 감독일진저, 문정희는 박정우의 의도를 가장 잘 꿰뚫고 있었으며 극의 흐름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다시 말하면 이런 얘기다.


정혜는 순종적인 며느리다. 어머니(김영애)는 앞 전에 있었던 원전 안전사고로 남편과 생때 같은 큰아들을 잃은 후 밥집을 해 가며 억세게 살아간다. 오로지 남은 자식(둘째 김남길)과 죽은 자식이 남기고 간 자식 생각밖에 없다. 며느리도 아껴 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정의 발로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식의 자식의 에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며느리는 그런 시어머니한테 성의를 다한다. 밥집 일을 묵묵히 도와 가며 끽소리 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던 그녀가 시어머니에게 표독스러워지기 시작하는 것은 원전사고로 자기 자식의 생명이 위험에 빠지면서부터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악다구니를 쓴다. “아무 일 없을 거라면서요! 그냥 가만히 있으라면서요! 그래서요!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됐냐구요! 내 새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다 어머니 책임인 줄 아세요!” 두 모성애는 자식 때문에 심각한 갈등과 충돌을 빚는다. 하지만 둘째 아들의 희생을 목격하면서 두 모성은 화해의 고리를 풀어나간다. 시어머니는 이기적인 모성애를 남(며느리)의 자식에 대한 모성애로 대체시킴으로써 더 큰 사랑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그때쯤 되면 영화관 안은 흐르는 눈물로 주체하기 어렵게 된다.


정혜 역의 문정희는 순정의 이미지에서 반항의 이미지로, 다시 화해와 용서, 희망의 이미지를 이어가며 교차시킨다. 그런데 그게 바로 묘하게도 영화 전체적으로 감독이 직조(織造)한 서술 구조와 맞아떨어진다. 박정우는 이 영화를 짜면서 현실 체제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다가 재난사고로 인해 기존 시스템이 붕괴하고 이에 따라 격렬하게 저항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결국에는 사람들이 합의와 협치(協治)로 모든 것을 극복해 가도록 했다.


그 흐름을 대변하는 캐릭터가 정혜 역의 문정희다. 아마 그건 박정우가 가장 믿고 맡기는 연기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얼터 에고(alter-dgo)나 페르소나(persona)라는 용어를 쓰는 게 오히려 좀 촌스러울 만큼 둘은 어느새 죽이 척척 맞는 감독과 배우 사이가 됐다. 문정희는 박정우를 2004년 ‘바람의 전설’ 때 만나 2012년 ‘연가시’의 주인공으로 재회했으며 이번 ‘판도라’에서 다시 한번 절묘한 합을 이루어 냈다.


솔직히 문정희는 예쁘다기 보다는 우아한 배우다. 아름다운 배우라는 말이 맞다. 그런데 박정우의 영화를 보면서 문정희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니 한 번도 없게 만든다. 다른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보이는 고색창연함이 박정우의 영화에서는 다 걷어 치워진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 솔직하고 담백하게 보인다. ‘연가시’에서 갈증을 견디지 못해 물을 쏟아 붓듯 마시던 장면 같은 것에서 문정희의 인간적 이미지 같은 것이 묻어 나온다고 하면 본인은 싫어 하거나 쑥스러워 하거나 혹은 거부할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번에도 문정희가 나와서 안심이 됐다. 그녀가 어디 있을지, 처음부터 스크린을 찾게 만든다. 그건 마치 데미언 채즐 감독의 ‘라라랜드’에서 J.K.시몬즈가 작은 단역(이지만 나름 중요한 역)으로 잠깐 나올 때 그럼 그렇지 하는 기분이 드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둘은 ‘위플래쉬’에서 절대 공력을 주고 받은 바 있다.


한 감독과 한 여배우가 비교적 오랜 기간 우정을 나눠 가며 영화를 함께하는 모습은 관객에게 편안함을 준다. 금슬 좋은 부부의 가정을 들여다 보는 듯한 느낌이다. 박정우와 문정희가 계속 그럴 수 있을까. 그럴 것으로 보인다. 물론 둘의 속 사정은 잘 알지 못한다. 촬영장에서는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였을 수도 있겠다. 영화 촬영은 전쟁이니까. 그러니 그걸 과연 누가 알 수 있겠는가. ●


오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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