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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품 60종 약국 앞 화상 자판기서 살 수 있다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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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4년 전 인천시 부평구의 한 약국에 ‘의약품화상판매기’가 등장했다. 한 약사가 개발해 시범적으로 설치했다. 환자가 약국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약사와 화상으로 통화해서 약을 구매하는 장치였다. 하지만 두 달 만에 철거됐다. 정부가 “약사는 약국 안에서만 약을 팔아야 한다”고 약사법 유권해석을 했기 때문이다. 이 판매기가 4년 만에 부활할 전망이다.

정부 허용안 통과, 국회 심의 남아
야간·공휴일에도 약사와 화상통화
약사가 해당 약 버튼 누르면 나와
“오·남용 우려 없고 구매 편리해져”
약사회는 “의료 영리화 꼼수” 반발

정부는 13일 국무회의에서 화상판매기 설치를 허용하는 약사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률은 곧 국회에 제출될 예정이다. 하지만 대한약사회가 강하게 반대하고 있어 국회 통과에 난항도 예상된다.

개정안에 따르면 화상판매기는 약국과 외부의 경계선에 설치된다. 작동 원리는 이렇다. 환자가 판매기 버튼을 누르면 약사가 화면에 나오고 증상을 묻고 답하는 식으로 화상 복약 지도가 이어진다. 약사는 집이나 다른 곳에서 전용 단말기로 환자와 대화한다. 적합한 약을 제시하면 환자가 카드로 결제하고 약사가 단말기의 해당 약 버튼을 누르면 판매기 배출구에 약이 나온다. 여기에 설치된 카메라로 약이 맞는지도 확인한다. 화상판매 과정은 녹화해서 6개월간 보관한다. 약의 변질·오염 방지 장치가 있어야 하고 약국 개설자가 화상 판매를 해야만 한다. 고용 약사는 할 수 없다. 판매기에는 의사 처방이 필요 없는 60종의 일반의약품이 들어갈 예정이다. 6월 말 현재 4만1112개의 약 중 일반 약은 1만5164개다. 일반 약이라면 어떤 종류든 판매 가능하다.

화상판매는 지난 5월 박근혜 대통령 주재 규제개혁장관회의에서 도입이 결정됐다. 윤병철 보건복지부 약무정책과장은 “야간이나 공휴일에 약국이 문을 닫아 환자들이 약을 구입하기 힘든 점을 개선하기 위해 화상판매기를 도입하게 됐다”며 “편의점(2만8000여 곳)에서 감기약·소화제 등 13가지 약을 팔지만 이것만으로 부족해 이를 보완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윤 과장은 또 “약사가 약을 선택해서 환자에게 제시하기 때문에 오·남용 우려가 없다”며 “미국과 스웨덴에도 이러한 판매기가 있다”고 덧붙였다. 약사회가 자율적으로 운영 중인 당번약국제도(휴일지킴이)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점도 화상판매기 도입을 결정한 배경 중 하나다. 전문가들은 제도 도입 취지에는 대체로 공감한다. 조재국 동양대 보건의료행정학과 교수는 “편의점이 없는 지역의 약국에 설치하면 지역 주민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영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국민의 약품 접근성을 높이면서도 남용 우려가 없어 특별히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판매기 대당 가격이 1800만원(예상)으로 고가여서 실제로 설치할 약국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신 박사는 “야간이나 새벽에 시도 때도 없이 환자 콜을 받는 걸 감수하고도 설치할 약국이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대한약사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탄핵의 혼란 시기에 급하지 않은 법률을 처리한 것은 의료 영리화를 위한 꼼수로 보인다. 총력 저지하겠다”고 밝혔다. 조찬휘 대한약사회장은 “필요성은 낮으면서 값은 비싼 판매기를 누가 설치하겠느냐”며 “결국에는 편의점·음식점·공공장소 등에 설치하게 될 것이며 이는 일부 재력가들의 수익만 더 불려주고 국민 건강에는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약사회는 기기 오작동에 따른 부작용 우려도 제기하고 있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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