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데스크 view &] ‘벤처 지원’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8면

김준현 산업 데스크

김준현
산업 데스크

처음부터 걱정했다.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를 경제 정책의 새 패러다임으로 내세웠던 일 말이다. 김대중 정부의 벤처창업,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금융허브,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을 차기 정부가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걸 우리는 목격했다. 창조경제의 운명을 예감하면서도 걱정을 떨치지 못한 건 창조경제만은 여느 구호와 다르다는 생각에서였다. 대기업의 성장 정체, 중소기업의 경쟁력 결핍 와중에 창업을 통한 혁신 DNA 공급마저 끊긴다면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을까.

창업 붐 살린 건 이 정부의 공로
힘들여 쌓은 탑 무너뜨려선 안돼
영국선 집권당 바뀌어도 정책 지속
주요정책 5년마다 리셋, 미래 없어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다. 서울시가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에 대한 내년 예산 20억원 전액을 철회한 게 대표적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달 예산안 브리핑에서 “(서울의) 창조경제 사업이 대기업(CJ)을 비틀어서 추진했다는 것이 밝혀진 상황”이라며 “창조가 일어날 수 없는 방식이었다”고 비판했다.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는 반발한다. 센터 측은 “서울센터는 예전 미래부 산하 창업기관이었던 드림엔터가 바뀐 것이고, CJ는 인테리어 비용 7억원을 댄 게 전부다. 예산 삭감은 젊은이들의 도전이란 본질에 눈 감은 정치적 도발”이라고 항변했다.

최근 본지가 전국 17개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취재한 결과,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사건’ 이후 눈에 띄게 활력이 떨어지고 있음이 확인됐다. 각종 행사가 취소되는가 하면 지원자가 없어 센터장을 뽑지 못하는 곳도 있었다. 센터에 입주한 기업들은 창업 공간과 자금 등 각종 지원이 끊기지 않을까 우려했다.

이렇듯 창조경제가 위기에 직면했지만 많은 학계·경제계 전문가들이 박근혜 정부가 그나마 잘한 일로 창조경제를 꼽는 건 아이러니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조차 지난 10월 “박근혜 정부에서 비교적 그래도 가장 노력을 많이 하는 부분이 이런 벤처창업에 대한 지원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 정부 들어 창업 분위기가 확산된 건 분명하다. 올 상반기 신설 법인 수는 4만8263개로 반기 기준 역대 최대치였다. 지난해 2조원으로 15년 최고치였던 벤처투자 규모는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2조100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대학 창업동아리 수도 2012년 1222개에서 지난달 6561개로 5배 이상 늘었다. 블룸버그 혁신지수에서 한국이 3년(2014~16년) 연속 1위에 오른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물론 부작용도 있다. 박원순 시장의 비판처럼 대기업 손목을 비틀어 혁신센터를 만든 것 자체가 개발연대식 발상이다. 일부 지방 혁신센터의 경우 벌써부터 연수원이나 사내 벤처의 사무공간으로 활용할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창조경제의 성공 모델로 칭송받다가 대표가 사기 혐의로 구속된 아이카이스트 같은 기업도 여럿 나올 수 있다. 정부 지원 자금만 노리는 ‘무늬만 벤처’도 여럿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중단할 수 없다. 기우뚱거리는 이가 있다면 확 밀어 쓰러뜨릴 게 아니라 똑바로 서도록 도와줘야 한다. 환부가 썩어 들어가고 있다면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두지 말고 환부를 깨끗이 도려내줘야 한다. 중국·일본 등 경쟁국들은 국가의 사활을 걸고 우리의 창조경제 같은 창업 생태계 확보에 나섰는데 박근혜가 밉다고 창조경제까지 내팽개칠 수는 없다. 창조경제가 박근혜 정부의 주홍글씨가 되게 해선 안된다. .

영국은 제조업이 한계에 부딪히자 1997년 문화·기술 혁신을 근간으로 한 크리에이티브 브리튼(Creative Britain) 정책을 수립했다. 토니 블레어가 총리 집권 첫해에 이 정책을 만든 이후 총리가 세 번, 집권당이 한 번 바뀌었지만 정책은 줄곧 계승됐다. 영국이 뮤지컬·팝·영화·패션 등 문화산업은 물론 인공지능과 같은 첨단 기술 분야에서도 세계 선두권에 있는 배경이다. 벤처기업 정책을 노무현 정부가, 금융허브 정책을 이명박 정부가, 녹색성장 정책을 박근혜 정부가 계승했더라면 우리는 벤처·금융·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 강국이 됐을지 누가 아나. 하지만 5년마다 리셋되는 바람에 힘들여 쌓은 탑은 모두 무너졌다.

창조경제라 부르지 않아도 좋다. 정책을 대수술해도 좋다. 하지만 창업 생태계 조성이란 쇼는 계속되어야만 한다.

김준현 산업 데스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