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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걸어요 데이트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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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9호 34면

나는 꿈을 꾸었다. 원래 꿈을 꾸지 않거나 꾸었다 해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거의 매일 밤 꿈을 꾼다. 그러니까 이것은 모두 꿈이다.


대통령은 제4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이번이 4차니까 당연히 1차, 2차, 3차 담화가 있었다. 그때마다 나라가 시끄러웠다. 대통령은 점점 젊어지고 아름다워졌다. 처음에 그는 60대의 디그니티 있고 엘레강스하고 차밍한 여성이었지만 마치 시간이 거꾸로 가는 벤자민 버튼처럼 50대가 되고 40대가 되더니 마침내 10대의 소녀가 되었다. 고개를 숙이자 소녀의 머리에서 60대 다른 여자의 상반신이 튀어나왔다. 마치 영화 ‘토탈 리콜’에서 반군 중 한 명의 몸 속에서 반군 지도자의 상반신이 나오던 것처럼. 어떤 때는 담화를 마치고 돌아서는 대통령의 등 뒤에서 아홉 사람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악몽 때문에 나는 소리를 질렀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아내가 그런 나를 흔들어 깨웠다. 속옷이 온통 땀에 젖어있었다. 아내가 말했다. 또 악몽을 꿨나 보네. 윗집 때문이야.


이번에 이사한 집은 층간 소음이 심했다. 이사 오고 며칠 동안은 잘 몰랐는데 밤이면 위층에서 어떤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윗집에는 여자 혼자 산다고 한다. 그런데 혼자 사는 집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들이 났다. 가령 누군가와 대화하거나 때로 다투는 소리도 났고 여러 명이 뛰어다니거나 일제히 웃는 소리도 들렸다. 무거운 물건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소리도 들렸다. 물론 전화통화였을 수도 있고 손님들이 찾아왔을 수도 있다. 가구를 옮길 수도 있다. 가끔이라면 말이다. 그런 소리들은 거의 매일 들렸다.


처음부터 아내는 윗집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사 온 다음 날인가 음식을 해서 앞집과 아래윗집에 돌렸는데 그 집만 문을 열어주지 않더라는 것이다. 불도 켜져 있고 사람 소리도 들리는데 말이다. 기분 나쁜 거절이었다. 윗집의 소음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몇 번인가 망설이고 참다가 아내가 윗집에 올라갔지만 여전히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인터폰을 눌러도 응답이 없었다. 분명 안에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아파트 경비 아저씨께도 사정을 말하고 관리사무소에도 전화를 걸어 진정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들도 그 윗집여자 일이라면 두려워하며 속수무책이라고 했다. 공연히 자기들만 곤란해진다고. 먼저 살던 사람들도 계약기간이 한참 남았는데 그래서 결국 이사를 간 거 아니겠느냐고. 정 못 참겠으면 법으로 고소를 하시라고.


계속되는 불면과 악몽 때문에 늘 머리가 아프고 몸이 무거웠다. 아파트 계단 오르내리기도 힘들었다. 5층 아파트라 엘리베이터가 없다. 우리 집은 5층에 있어 위층도 윗집도 없다. 기분전환이라도 하려고 주말에 아내와 데이트를 했다. 아버지가 병석에 계셔서 주말마다 울산에 다녀오느라 아내와 단둘이 시간을 갖기는 오랜만이었다. 30년 전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걷기 데이트를 좋아했다. 지금도 나는 ‘데이트’라고 하면 함께 걷는 것을 떠올린다. 토요일에도 출근하는 나는 오후 3시에 퇴근하여 광화문 교보문고 앞으로 갔다. 시청 앞에서부터 광화문까지 도로에는 벌써부터 사람들이 많았다.


아내와 나는 사람들 속에서 함께 걸었다. 류마티스 관절염 앓는 아내의 다리가 걱정이었지만 아내는 괜찮다고, 계속 걷고 싶다고 말했다. 날씨가 추웠지만 사람들 때문에 춥지 않았다.


옆에서 함께 걷는 사람들도, 반대편에서 지나치는 사람들도 눈이 마주치면 따뜻한 눈인사를 서로에게 건넸다. 시간이 갈수록, 어두워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났다. 손을 꼭 잡은 노부부, 아이를 무등 태운 아빠,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 중고등학생들, 직장인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걷고 있었다.


영화관이나 TV에서 보던 배우들도 보였다. 작가들도 보였다. 자주 가던 식당의 아주머니도, 아르바이트생도 있었다. 친구들도, 직장 동료들도 보였다. 벤자민 버튼도 반군 지도자도 있었다. 울산의 병원에 계셔야 할, 거동이 어려운 아버지도 걷고 있었다. 어머니도, 아이들도 있었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도, 윗집 여자도 그리고 제4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광장으로 내려온 대통령도 함께 걷고 있었다. ●


김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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