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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교과서 개편 아길 멀다|결실없이 끝난 시안 설명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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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제 우리 사회에 생각이 틀리면 자리를 함께 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는지도 모른다. 지난 17일의 국사교과서 개편시안 설명회도 그런 자리의 하나였다.
이날 민족사 바로잡기 국민회의(의장 윤보선)는 지난달 25일 국사교육심의회(위원장 변태섭)가 발표한 국사교과서 개편시안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보고 22명의 국사교육심의위원들을 초청, 직접 설명을 들어보는 「시안설명 학술회의」를 가지려 했으나 대부분의 심의위원들이 불참함으로써 몰려든 5백여명의 방청객을 실망시켰다.
이날 처음부터 참석한 학자는 평소 시안의 문제점을 제기해온 윤교현·손보기 교수뿐이며 뒤늦게 이현희·박영석·박성수 교수 등이 합석했다.
이에 앞서 주최측은 「민족의 기원 및 구성에 대한 서술은 어떤 내용으로 할 것인가」「신석기문화에 대한서술은 어떤 내용으로 할 것인가」등 26개항에 달하는 질문서를 초청학자들에게 보냈으나 불참학자들은 『사전에 상의한번 없이 일방적으로 호출하는 식의 초청은 곤란하다』『학술적 분위기를 보장받을 수 없다』『강의가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참석을 거절했다.
참석자의 한사람인 박영석 국사편찬위원장은 『초청학자들의 참석에 대한 사전양해가 제대로 없었던 것 같다』며 주최측의 미숙한 준비를 지적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날 행사는 질문서에 대한 답변이라기보다 참석학자들의 평소 국사교육·한국사연구방향 등에 대한소신의 피력으로 일관했다.
손정기 교수(연세대)는 『역사는 하루아침에 쓸 수 없다』면서 『빠듯한 시한부터 정한 문교당국의 치사는 바로 역사의식의 결여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국사교육심의회는 슬슬 넘어가는 분위기였으며 회의록조차 남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러나 『상대를 무조건 비판만 하지 말고 서로노력·격려하는 분위기로 일해 나가자』고 주장했다.
윤내현 교수(단국대)는 『국사교육심의회가 일방적으로 일을 처리해 심의위원직을 사퇴했다』고 사퇴경위를 설명하고 『현재와 같은 모호한 시안으론 집필자에 따라 상당히 다른 방향의 교과서를 집필할 우려가 있다』 면서 『시안을 보다 구체화할 것』을 주장했다.
한편 박영석 국편위원장은 『국사교육 문제를 놓고 인신공격적인 주장도 많다』고 지적하고 이런 분위기선 교과서 집필자를 구하기도 힘들다』고 비판한 뒤 『그러나 졸속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결국 『국사교과서 개편심의위원 및 분야별 집필자들을 재편성해 줄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국사교육 문제를 둘러싸고 크게 학계와 「재야」로 대립되는 최근의 양상은 학계가 「학문의 국수주의화」를 우려한다면 「재야」는 「식민사관의 청산」을 요구하고 있다. 서로가 역사의 객관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역사서술에 절대객관성이란 있을 수 없다고 보는 쪽에선 이것이 상대방을 비판하기 위한 용어가 아닌가고 지적하기도 한다.
결국 이 문제는 어느날 갑자기 해소될 성질의 문제는 아니라는게 주변의 얘기다. 감정적인 대응을 중지하고 학술적인 논의의 폭을 넓혀나가던 상태를 크게 호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현행 국정교과서 발행제도를 검인정화한다면 사태를 개선시키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보고있다.
연구의 축적이 빈약해 논란이 큰 부분은 잠정적으로「설은 설로서」소개하고 이런 부분의 연구에 대한 획기적인 지원책도 강구돼야 할 것이란 주장도 있다. <이근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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