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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을 넘어서|청진서 서울까지 동토탈출기|김만철<3>|시베리아 벌목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표류 4일째. 청진호는 파도치는대로 곤두박질쳤다.
가족들은 추위와 멀미, 그리고 허기와 갈증으로 탈진상태.
「아직도 북한영해에서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길한 예감이 공포를 몰고왔다.
북한에서는 보위부원이 나타났다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멈춘다. 보위부는 그만큼 악명높은 정보기관이다.
내친구 김정사(청진시 도시설계사업소설계원)도 『피바다가극단이 불바다가극단이 됐다』고 떠들며 다니다 보위부에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고 내동생 동철이도 보위부에 끌려가 쥐도새도 모르게 목숨을 잃었다. 그런 보위부에 내가 근무할뻔 한 적이 있었다.
청진의대 병원에서 내가 택한 수련과목은 비뇨기과였지만 지병인 신장염은 치료할 수없었다. 정상근무를 할 수 없을만큼 악화됐다.
신장염치료에는 녹용이 특효였다. 그러나 모든 식품이 배급제인 북한에서 녹용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71년 여름, 나는 신장염치료를 위한 녹용을 얻기 위해 청진시 부근 협동농장인 마전사슴목장 근무를 자원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농장진료소장겸 기계지도원으로 근무했다.
녹용을 먹고 건강이 회복되면 대학병원으로 다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해 가을, 싱싱한 녹용 한개를 얻었다. 녹용의 효과탓인지, 신장염은 씻은듯이 나았다.
사슴목장근무 2년째인 73년 가을, 나는 우연한 인연으로 정치보위부원이 될 수 있는 계기를 잡았다.
마전사슴목장에 가끔 사슴피를 마시러 왔던 청진시 보의부장 남궁은이 나를 발탁한 것이다. 당시 시보의부는 보위부 청사를 신축하고 있었다. 남궁부장은 공사기간중 「시공지도원」을 맡아 무난히 공사를 끝내면 「시보위부법원지도원」으로 뽑아주겠다고 약속했다.
열심히 일했다. 출세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는 열망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열망은 2년도 채 못돼 산산히 깨졌다. 동생 동철의 「김일성 초상화 모독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75년 봄, 평양미대를 졸업한 동철은 당의 요청으로 김일성의 대형 초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이때 화폭을 엉덩이로 깔고 앉은 것이 화근이 됐다. 화폭이 워낙 커서 붓을 놀리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비서는 『위대한 수령동지의 용안을 깔고 앉아 수령동지의 존엄성을 실추시켰다』며 동철을 비판했다.
이날 이후 동철은 소식이 끊겼다. 보위부에 끌려간 것이다.
북한에서는 「초상화 보위사업」이란 별난 사업이 있다. 초상화를 깨끗이 닦고 향수까지 뿌리는 사업이다.
보위사업을 위한 붉은 비단천·향수병 등을 넣어두는 상자는 「정성함」이라 부른다. 인민위원회는 분기별로 초상화 검열이란걸 실시한다. 먼지가 끼는 등 보관상태불량이 적발되면 1년내내 자아비판을 해야한다.
이렇게 신주처럼 떠받드는 초상화를 깔고 앉았으니 동철이 성할리 없었다.
이 사건으로 정치보위부원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당이 「반동분자의 형」을 국가기밀정보요원으로 남겨둘리 없었다.
75년 9월, 대학병원으로 원대복귀했다. 3년8개월만의 복귀였다. 사실상 병원복귀도 불가능했지만 남궁부장이 힘을 써줬다. 시보위부장 정도의 입김이 작용하면 관할구역내에서는 안되는 일이없다.
그러나 동생의 초상화사건은 계속 나를 괴롭혔다.
이것이 북한탈출을 결심한 계기가 됐다.
청진의대병원 근무기간은 만 11년 3개월. 이 기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두만강 초대소 파견근무의 추억이다.
북한은 82년 초부터 벌목노동자를 소련으로 파견했다. 두만강 초대소는 이들이 최종신체검사를 받기위해 머무르는 숙소였다. 내 임무는 파견노동자의 신체검사.
벌목작업은 수입이 좋았다. 도급제였기 때문에 월7백∼8백원의 수입을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의사의 봉급은 1백∼1백20원.
이 때문에 북한주민들은 앞을 다투어 지원했다. 노동자들은 신체검사에 무사통과하기 위해 뇌물공세를 폈다.. 내 침실엔 이들이 뇌물로 바친 인산주·삼로주·뱀술 등이 항상 가득 쌓이곤 했다.
『김동무, 뇌물 좀 작작 받으시오.』
어느날 내 방을 찾은 중앙당지도원이 침실 벽장에 가득찬 술병을 보고 주의를 줬다. 그러나 나는 술을 마실줄 몰랐다.
다음날 간호원을 시켜 50여병을 선물했더니 그 친구 반응이 걸작이었다.
『뇌물받고 합격시겨도 좋소. 송환되는 사람만 없도록 하시오.』
파견근무자중에는 소련여자와 눈이 맞아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다. 한 노동자가 소련여자와 동침하다 출장에서 돌아온 소련인 남편에게 적발된 적이 있다. 남편은 잔인하게 두 사람을 전기톱으로 토막내 죽였다.
이곳에서 범법자들은 대부분 강제 송환되는데 북한측은 범인들을 송환할 때 수갑을 채우는 대신 팔에 기프스를 한다. 외국인이 보는 앞에서 수갑을 채우는 것은 주체(?)조선의 망신이라는 발상에서다. 그래서 범죄자 송환대열을 「기프스대열」이라 했다.
「통조림대열」도 있다. 작업도중 사망자는 목만 댕강 잘라 철관에 넣어 수송했다. 그래서 생긴 이름이다. 워낙 사망자가 많아 수송편의(?)상 생각해낸 잔인한 묘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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