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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 강유정의 까칠한 시선] 할리우드에서나 가능한 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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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버넌트` 스틸컷

영화 `레버넌트` 스틸컷

눈이다, 눈. 처음부터 끝까지 눈, 눈, 눈이다. ‘헤이트풀8’(1월 7일 개봉,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도 그렇고,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1월 14일 개봉,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이하 ‘레버넌트’)도 그렇다.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분명히 광야인데, 언제 끝날까 싶게 눈보라가 몰아치고, 어디가 끝인가 싶게 눈이 쌓여 있다. 눈, 하니 ‘대호’(2015, 박훈정 감독)도 떠오른다. 눈과 야수 그리고 사람들. 어떤 점에서 세 영화는 조금씩 닮아 있고, 또 조금씩 다르다.

가장 큰 공통점은 감독이 해 보고 싶은 것을 극한으로 밀어붙였다는 점이고, 가장 큰 차이점은 그 결과다. ‘헤이트풀8’은 타란티노 감독의 매니어에게 만족도 높은 결과물이다. 여러 인물들이 눈보라에 포위된 집 한 채, 아니 방 한 칸에 모여든다. 그리고 이 폐쇄된 공간에서 숨겨 왔던 비밀과 거짓말과 상처에서 흐르는 피처럼 진실이 새어 나온다.

그런데 비극적인 게 아니라 미치도록 웃기다. 마침내 누군가 목숨을 잃고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는데, 그 한쪽 손엔 다른 사람의 잘려진 팔꿈치가 ‘메롱’ 하며 혓바닥을 내밀 듯 걸려 있다. 이상하고 야릇하지만 웃지 않고 배길 수가 없다. 이 이상함은 모두 용서된다. 왜? 타란티노 영화니까. 타란티노 영화를 보러 오면서 이런 황당한 장면이 나오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거꾸로 물어보고 싶다.

‘레버넌트’의 화면은 더욱 갸륵하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빛의 조도와는 다른, 어둡고 새파란 빛이 화면을 지배한다. 사실 불편하다. 우리가 할리우드 영화를 볼 때 기대하는 그런 때깔과는 다르니 말이다. 심지어 주인공은 6개월은 씻지 않은 듯 떡진 머리에 더러운 옷을 입고 돌아다닌다. 대사도 거의 없다. 있어도 인디안 부족의 말이다.

그런데 이 이상한 체험이 마치 타고 남은 재가 기름이 되는 듯한 기묘한 쾌감을 선사한다. 끝까지 밀어붙여서 얻은 결실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의 망막은 점차 자연광에 적응한다. 광활한 눈밭과 앞을 모르는 폭포수 한가운데를 헤매다 보니, 주인공에게 자세한 설명을 듣는 일은 포기하게 된다. 아니, 어느새 말의 내장을 비우고 그 안에 들어가 폭설을 피해야 하는 주인공의 심정에 이입하게 된다. 아니다, 그런 방법 하나를 배웠다고 하는 게 옳다. 어느새 그는 이상한 남자가 아니라, 자동차나 옷이 없다면 야생의 밤을 하루도 지새지 못할 나에 비해 훨씬 더 지혜롭고 월등한 인간이 되어 있다. 이냐리투 감독의 설득이 통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광경을 일컬어 작가주의라고 부른다. 하고 싶은 이야기, 그 좁고 깊은 세계를 하고 싶은 만큼 하는 영화광의 세상. 하지만 최근 한국영화에서 가장 보기 힘든 게 ‘주의’다. 작가는 ‘주의’보다 먼저 사라진 것 같다. 상업주의도 ‘주의’인데, 이것도 꽤나 주체적으로 할 때 이야기이고, 그나마도 시스템의 일부로 흡입된 채 상업적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레버넌트’의 제작비는 약 1580억원에 육박한다. 과연 한국에서 1600억원짜리 작가주의 영화가 가능할까. 10분의 1 정도 되는 160억원이라고 해도, ‘레버넌트’같은 영화를 찍는다면 과연 투자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대자연과의 사투를 통해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걸 모두 보여주는 것. 한국 영화계에선 과연 누가 할 수 있을까.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 엠마누엘 루베즈키의 촬영이 빚어낸 영화의 오트 쿠튀르. 이토록 사치스러운 명작이 가능한 할리우드가 부럽고 질투난다.

강유정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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