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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리포트] 출동 땐 “다치지 말자” 복창…“경찰들이 고생” 말해줄 땐 울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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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촛불시위대 앞에선 의경들

12일 3차 촛불집회에서 마주 선 경찰과 시위대. 이들 사이엔 팽팽한 긴장감이 돌게 마련이다. 그러나 최순실 국정 농단을 둘러싼 촛불집회는 다르다. 시민은 한결같이 평화를 외친다. 직무상 입을 열지 못하는 경찰은 그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킨다. [뉴시스]

12일 3차 촛불집회에서 마주 선 경찰과 시위대. 이들 사이엔 팽팽한 긴장감이 돌게 마련이다. 그러나 최순실 국정 농단을 둘러싼 촛불집회는 다르다. 시민은 한결같이 평화를 외친다. 직무상 입을 열지 못하는 경찰은 그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킨다. [뉴시스]

지난달 29일 이후 한 달째 이어지고 있는 주말 촛불집회에서 청춘은 단연 눈에 띄는 존재입니다. 2030들은 한 손엔 촛불을 나머지 한 손엔 플래카드를 들고 백만 넘는 시민과 함께합니다. ‘하야하그라’ ‘박라임 퇴진’ 같은 풍자부터 경찰 차벽에 꽃무늬 스티커를 붙이는 퍼포먼스까지 그간 비장하고 때론 폭력적이었던 시위를 재기 발랄한 문화행사로 만든 데도 이들의 역할이 큽니다.

우리도 문제의식 있는 시민인데
“폭력경찰 물러가라” 구호 땐 씁쓸
복무 중 아니라면 나도 나왔을 것

하지만 광화문광장의 청춘은 이들만이 아닙니다. 형광색 점퍼에 검은색 바지. ‘이 선을 넘지 마시오’라고 적힌 노란 바리케이드 뒤에 묵묵히 서 있는 의무경찰과 초임 경찰관도 청춘입니다. 요즘엔 “고생 많다”며 시위대로부터 격려를 받기도 하지만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에도 대거리하지 못한 채 시위대와 맞서야 합니다. 말 그대로 ‘육탄저지선’인 셈이죠.

사상 최대 규모라는 이번 촛불집회에서 동년배들과 맞닥뜨린 청춘 경찰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상식을 세우려는 시민들의 열망 사이에서 고민하지는 않았을까요.

청춘리포트는 시위진압 업무를 맡고 있는 의경과 직업경찰관들의 솔직한 속내를 들어봤습니다. (※20대 의경 3명과 직업경찰관 2명을 각각 인터뷰한 뒤 지난 26일 5차 촛불집회의 진행 상황에 맞춰 시간대별로 재구성했습니다.)

최근 촛불집회에선 시민과 경찰이 훈훈한 풍경을 자주 연출한다. 시민들이 길을 막은 경찰 앞에 간식을 쌓아 둔 장면. [사진 채승기 기자]

최근 촛불집회에선 시민과 경찰이 훈훈한 풍경을 자주 연출한다. 시민들이 길을 막은 경찰 앞에 간식을 쌓아 둔 장면. [사진 채승기 기자]

AM 10시=시위진압에 투입되기 전 장비와 대오를 점검할 때 의경들은 가장 긴장한다. 만반의 준비를 해야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1년 넘게 시위 현장을 지킨 김모(22)씨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안전이다. 지휘부에서는 “흠잡힐 만한 행동하지 말고, 충돌은 되도록 피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동료에게도 일일이 “다치지 말자”고 당부했다.

장비와 비품에도 신경 써야 한다. 요즘 같이 날씨가 추울 때 핫팩은 필수 아이템이다. 동료 대원들은 허리와 다리에 파스를 붙였다. 장시간 서서 버티다 보면 근육에 무리가 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밤샘 집회가 예정된 만큼 근무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더 단단히 준비했다.” 의경 복무 6개월째인 의경 전모(23)씨의 설명이다. 그는 서울에만 100만 명이 모였던 지난 12일 3차 촛불집회 때 오후 8시부터 이튿날 오전 4시까지 8시간가량을 한자리에 서 있었다.

PM 2시=광화문광장 인근에는 이미 수만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입장이 다를 뿐이지 시위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국민이 있을까요.” 시위 현장에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묻자 “정치적 중립 의무가 있다”며 몇 번을 망설이던 현직 경찰관 A씨(24)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실제 지난 24일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자신을 의경이라고 소개한 이의 글이 올라와 화제가 됐다.

“반정부 시위에서 의경들은 대부분 정부 편을 들기 쉬운데 이번 사태는 의경들조차 등 돌리게 했다. 마음 같아선 청와대로 가는 길을 열어주고 싶습니다. 저희를 대신해 토요일 시위에 많이 나와주세요.”

경찰과 시민이 차벽에 붙은 스티커를 함께 떼는 모습. [온라인 캡처]

경찰과 시민이 차벽에 붙은 스티커를 함께 떼는 모습. [온라인 캡처]

시위대 중에는 경찰관들과 같은 또래인 20대 대학생이 많다. 촛불을 들고 선 동년배들을 보며 시위에 동참하지 못하거나 자유롭게 의견을 얘기할 수 없어 아쉽진 않을까. 의경 구모(21)씨는 “복무 중이 아니었다면 나도 시위에 참여하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글도 많이 썼을 거다. 가끔 시민들이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기도 하는데, 나는 오히려 시위대에게 ‘힘내라’며 먹을 것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의경 전씨도 “아쉽지만 지금 군 복무를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며 “‘이것이 내 운명’이려니 체념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고 여긴다”고 했다.

PM 5시30분=청와대와 약 200m 거리인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 이곳부터 사직로와 삼청동 일대를 둘러싸며 청와대를 ‘포위’한 인간 띠 잇기 행진의 신고 시간이 끝났다. 경찰은 해산을 명했지만 일부 시민들은 “폭력경찰 물러가라. 불법 차벽 철거하라”며 소리쳤다. 여기를 막아섰던 경찰관 A씨는 씁쓸해했다.

“이번 촛불집회를 보며 단 한 번도 ‘시위를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경찰은 시위가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이뤄지도록 관리하는 것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절 보고 시위를 막는다고 불법경찰이라고 합니다.”

청와대 인근인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 시위대가 든 깃발이 막아선 경찰 위에 나부낀다.

청와대 인근인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 시위대가 든 깃발이 막아선 경찰 위에 나부낀다.

대치 상황이 계속되던 오후 7시.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몸싸움이 벌어지는 등 일부 과격한 움직임이 있었다. 의경 전씨는 지난 12일 시위 때 기억이 떠올랐다. 선임 의경이 버스 위에 올라온 시민을 막아서다 밑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동료가 잡아줘 큰 부상은 없었다. 전씨는 “그런 모습을 볼 때면 경찰과 시민이 왜 싸워야 할까 싶어 가슴이 아프다. 일반 군 복무보다 덜 답답할 것 같아 의경이 됐는데 시민들과 맞부딪히는 게 생각보다 많이 힘들다”고 말했다.

평화적으로 진행 중인 이번 촛불집회는 양상이 다르지만, 다른 시위 현장에선 경찰관이 시위대의 폭력에 노출되는 일은 없잖다. 그런 상황이 구씨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한다.

“의경이 되기 전엔 ‘시위하는 사람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국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않는 정치권에 일침을 가하려면 그들 편에 선 경찰의 저지선을 뚫는 것이 필요악이라 여겼으니까요. 하지만 의경이 되고 과격한 시위를 진압하러 자주 나가다 보니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PM 11시=시위가 소강 상태에 접어든 이후에도 일부 시민과 경찰의 대치는 계속됐다. 이때부터는 지루함과 육체적 피로를 견뎌야 한다. 김씨는 “계속 서 있다 보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머릿수를 세면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그는 “무거운 장비를 들고 8시간 동안 동료와 딱 붙어 선 채 버텨야 한다. ‘오늘은 언제 끝날까.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무엇보다 가장 크다. 헬멧을 오래 쓰고 있으면 머리도 아프다”고 덧붙였다.

자정 가까운 시간이 되면서 남아 있던 시민들도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일부 시민들은 의경들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넸고 안아주기도 했다. 현직 경찰관 B씨(24)는 “시민들이 ‘아무 잘못도 없는 당신들이 왜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해줬을 때 울컥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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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오전 3시가 돼서야 전씨가 속한 중대는 생활관에 복귀했다. 고된 몸을 이끌고 돌아가는 길에 전씨와 동료는 한숨을 섞어가며 얘기를 나눴다.

“날이 점점 추워지는데 이 시위는 언제쯤 끝날까. 제발 정치권에서 문제를 빨리 해결해 사회가 안정됐으면 좋겠다.”

윤재영 기자 yun.jaey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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