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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 조슬예의 아는 사람 이야기] 단관 극장의 추억을 함께한, 나의 오래된 '영화관 친구'

중앙일보

입력

영화 `타이타닉`

영화 `타이타닉`

학창 시절, 영화관에 함께 다니던 두 살 많은 오빠가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PC통신을 통해 알게 된 사이였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1998년 2월, 나는 긴 겨울방학의 무료함을 달래고자 ‘나우누리’ 영화 동호회에 가입했고, 그곳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던 그와 채팅하게 됐다. 비슷한 취향 덕분에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다 덜컥 “함께 영화를 보자”는 약속까지 잡아 버렸다. 채팅이 끝난 후에야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그땐 학생들끼리 극장에 가는 게 흔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일면식도 없는, 덧붙여 ‘오빠’가 아닌가. 한두 살 차이도 크게 느껴지던 나이, 이성과 단둘이 만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시기였다. ‘채팅으로 알게 된 동갑내기를 만나러 갔더니 웬 아저씨가 나왔더라’ 류의 흉흉한 괴담이 떠올랐다. 약속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연락처를 몰라 전전긍긍하다 결국 약속 당일이 됐다. 일방적으로 상대를 바람맞히는 건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약속 장소가 광주의 ‘현대극장’이라는 점이었다. 금남로의 끝자락, 광주천변에 위치한 그 극장은 언제나 북적였다. 또한 어머니가 일하시던 양동시장과 광주대교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여차하면 도망칠 수 있다’라는 마음가짐으로 도착한 극장 앞. 그와 처음 마주한 순간, 잔뜩 품었던 경계심과 긴장감이 무너지며 맥이 ‘탁!’ 풀렸다. 왜소한 체격에 큰 눈망울을 가진 그가 무척 작고 약해 보였기 때문이다(반대로 나는 또래에 비해 키가 컸고, 남자애들과의 힘 대결에도 자신이 있었다). 그 모습은 나를 안심시키기에 충분했지만, 어색함마저 덜어 주지는 못했다.

우리는 별다른 대화 없이 바로 영화표를 샀다. 아득히 먼 옛날 일 같지만 불과 18년 전, 그때는 단관 영화관 시대였다. 극장들 사이에는 개봉관·재개봉관·동시상영관 순으로 위계질서가 있었다. 현대극장은 개봉관이었고, 상영 작품은 그해 최고의 흥행작인 ‘타이타닉’(1997,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었다. 즉, ‘관객이 무척 많았다’는 뜻이다. 물론 700석 넘는 그 넓은 극장이 꽉 찰 리는 없었지만, 지정 좌석이 아니었기에 머뭇거리다가는 구석으로 내몰리기 십상이었다. 우리는 서둘러 상영관으로 들어갔고, 다행히 꽤 괜찮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극장 안의 불이 모두 꺼지고, 필름 돌아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며, 스크린이 밝아지는 그 순간을 나는 무척 좋아했다. 그때만 해도 광고나 다른 영화 예고편을 틀어 주지 않았기에, 그 두근거림을 유지한 채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다. ‘타이타닉’은 말이 필요 없는 명작이었다. 오빠는 상영이 끝나자마자 “한 번 더 볼까?” 물었고, 나는 격한 끄덕임으로 답했다(좌석이 지정돼 있지 않았기에 극장 안에서 잘 버틴다면 영화를 반복해 볼 수 있었다). 다음 상영이 시작되길 기다리던 우리는 어느새 컴퓨터 자판을 누르는 것보다 훨씬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 갔고, 그날 이후 ‘영화관 친구’가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현대극장 친구’였다. “이곳 상영작은 전부 좋아. 소문에는 극장주 할아버지가 엄청난 영화 매니어래.” 오빠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소문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그 극장에서 본 영화들은 모두 만족스러웠다.

1999년 광주에도 멀티플렉스(복합 상영관)가 생겼다. 기존 극장들은 시대 흐름에 따라 내부를 수리해 상영관을 나눴고, 몇몇은 문을 닫았다. 우리는 날로 한산해지는 현대극장을 보며, ‘언젠가 이곳도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우리의 영화관 동행이 끝난 것은, 현대극장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오빠가 ‘고3’ 수험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2001년 2월, 마지막으로 함께 현대극장을 찾았다. 상영 작품은 ‘빌리 엘리어트’(2000, 스티븐 달드리 감독)였다. 우리는 이 영화를 세 번 연달아 본 뒤, 두 눈이 퉁퉁 부은 채 밖으로 나왔다. 어두워진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어둠 속을 걸으니 ‘여전히 극장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 오빠가 말했다. “나, 영화감독이 될 거야.” 그 말에 적잖이 놀라 오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영화감독’이라는 꿈이 먼 나라 이야기처럼 아득하고 거창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1980년대 영국에서 소년 빌리(제이미 벨)가 발레를 하고 싶어하는 것만큼이나, 2001년 광주에서 평범한 고등학생이 영화감독을 꿈꾸는 것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오빠는 보란 듯이 이듬해 서울 소재 대학 영화과에 입학했고, 그해 5월 광주에 남겨진 난 현대극장이 문 닫는 것을 홀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나도 영화과에 가고 싶다”고 고백했다. 현재, 오빠와 나는 영화 관련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가끔 만나 단관 영화관, 현대극장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글: 조슬예
‘잉투기’(2013) ‘소셜포비아’(2015) 등에 참여한 시나리오 작가. 남의 얘기를 듣는 것도 내 얘기를 하는 것도 좋아해 ‘아는 사람 이야기’까지 연재하게 됐다. 취미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수다 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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