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 모금 늦어지자 ‘리커창 방한’ 이용해 밀어붙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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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최순실 국정 농단 외교까지 악용

‘최순실 공소장’은 ‘범죄’의 기록이다. 하지만 검찰이 20일 공개한 공소장에는 범죄사실 이외에도 최씨가 어떻게 국정을 농단했는지 나타나 있다. 특히 최씨가 국가의 정상외교 일정까지 미르재단 설립의 촉매제로 삼았음이 공소장에 적혀 있다.

대기업 출연 꺼려 두 달간 지지부진
최순실 “한·중 문화재단 MOU” 제안
대통령 지시 뒤 8일 만에 재단 설립

공소장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2015년 7월 24일부터 대기업 총수를 순차적으로 만나 미르재단 출연금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기업체들의 자금 출연은 순조롭지 않았고, 미르재단 설립은 두 달 이상 지지부진했다. 이때 최씨가 착안한 게 중국 리커창(李克强) 총리의 방한이었다.

한·중·일 정상회담 참석을 위해 리 총리가 10월 하순 방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씨는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에게 “리커창의 방한 때 양국 문화재단 간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는 것이 좋다. 문화재단 설립을 서두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검찰은 공소장에 적시했다.

재단 설립은 이로 인해 속도가 붙었다. 정 전 비서관에게서 관련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그해 10월 19일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당시 경제수석)에게 “리커창 총리 방한 때 MOU를 체결해야 하니 서두르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후 8일 만인 10월 27일 일사천리로 미르재단 설립이 이뤄졌다고 검찰은 밝혔다. 검찰은 최씨가 리 총리의 방한 정보를 언제 취득했는지는 적시하지 않았다. 다만 공소장에 의하면 박 대통령이 재단 설립을 서두르라고 지시한 10월 19일 이전에 알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만약 최씨가 일본 언론 등을 통해 관련 내용이 알려진 10월 중순보다 앞서 정보를 알게 됐다면 국가 기밀 누설 논란이 벌어질 수도 있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박 대통령이 안 전 수석 등에게 언제,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도 상세히 기록했다. 지난해 12월 11일 박 대통령은 안 전 수석에게 K스포츠재단의 이사장과 사무총장·감사·재무부장 등 임원진 인사안을 알리며 “사무실을 강남으로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검찰에 따르면 임원진 명단은 12월 초순 최씨가 정 전 비서관에게 보낸 것이었다. 당시 개성공단에선 차관급 남북 당국자 회담이 열릴 때였다. 8년 만에 열리는 남북 간 정식 당국 회담이었다. 남측 황부기 통일부 차관, 북측 전종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국장을 대표로 한 협상단은 이날 하루 동안 세 차례 만났지만 이산가족 상봉 문제 등 현안에 대한 신경전으로 좀처럼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전 국민의 이목이 개성공단에 집중된 이날 K스포츠재단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공소장에서 박 대통령이 안 전 수석에게 최씨가 설립한 광고제작회사 ‘플레이그라운드’와 관련한 자료를 건네며 “이를 현대자동차 측에 전달하라”고 한 건 올해 2월 15일이었다. 그 뒤 안 전 수석은 현대자동차 측에 플레이그라운드의 광고 수주를 요구한다.

이때는 2월 7일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한반도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갈 때였다. 지난 2월 10일 개성공단이 12년 만에 가동을 중단했고, 미 본토에서 해병 4500명과 핵 잠수함 등 첨단무기가 한반도로 이동을 시작했다. 2월 16일에는 박 대통령의 국회 대북 정책 관련 국정연설이 예정돼 있었다.

공소장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올해 2월 22일 포스코 권오준 회장에게 “여자 배드민턴 팀을 창단해 주면 좋겠다. (최순실씨의)더블루K가 자문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소장대로라면 박 대통령은 최씨가 세운 회사인 더블루K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날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하며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북한 핵실험 등으로 고조된 한반도 긴장이 경제에 더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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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비박계 의원은 “한편으론 경제 걱정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기업에 부담을 주려 했다”고 비판했다.

서승욱 기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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