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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생의 시대 정치적 불확실성이 최대 변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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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호 18면


경제의 최대 악재가 불확실성이라면, 2017년 세계경제는 최악의 해가 될 것 같다. 온통 불확실성투성이다. 국내외 경제전망 기관이 내놓은 내년 세계경제 성장률 전망치는 대체로 3% 안팎이다. 그러나 성장을 방해할 불확실성이 곳곳에 깔려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으로 확인된 ‘반체제, 반세계화’ 정서도 확산할 조짐이다. 주요국이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로 들어서면서 보호무역을 둘러싼 마찰도 우려된다. 중앙SUNDAY는 2017년 세계경제를 읽는 관전 포인트를 ‘TRUMP’로 정리했다. 트럼프 리스크(Trump Risk), 부채의 복수(Revenge of Deb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UK Exit), 권력의 이동(Movement of Power), ?정책 소진(Policy Exhaustion)이다.

세계 증시에 훈풍을 돌게 한 도널드 트럼프와 세계 금융시장의 ‘허니문 랠리’는 얼마나 이어질까.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15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금융시장에서 트럼프에 대한 기대는 이미 한계에 도달하고 있으며, 급등한 수준만큼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뜻이다.


허니문이 끝나면 트럼프가 ‘나쁜 신랑’ 본색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는 선거 유세 기간 동안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도발적인 공약을 내놓으며 시장의 불안을 키웠다. 그 공약이 트럼프의 입을 통해 구체화될 때마다 시장은 큰 폭의 등락을 거듭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예측이 어렵고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대(對)중국 전략만 봐도 그렇다. 최근 CNN이 보도한 트럼프 정권인수위원회 ‘200일 계획’에 따르면, 미국은 새 정부 출범 후 100일째에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중국은 즉각 발끈하며 보복 조치에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 그러자 트럼프의 경제자문인 윌버 로스는 “중국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협상 전략일 뿐”이라고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이 말 자체가 중국의 경계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협상 전략일지 모른다. 그만큼 트럼프는 불확실하다. 그가 약속한 ‘1조 달러 인프라 투자’도 마찬가지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의 인프라 투자 계획은 전액 민간자본에 의존한다”며 “충분한 자금이 마련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확실한 것은 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보호무역을 강화할 것이라는 점이다. FT는 “미국 우선주의 정책으로 유럽과 신흥국 수출에 미치는 부정적 충격은 불가피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부문장은 “국제협력의 실효성이 줄면서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갈등과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며 “주요국 간 갈등이 심화하면서 환율 변동성이 확대하고 가뜩이나 위축된 국제교역을 더욱 짓누를 수 있다”고 말했다.

“내년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를 세 번 올릴 수 있다.”


골드먼삭스가 최근 내놓은 전망이다. 미국 경제가 좋아진다는 얘기인데, 채무자에겐 끔찍한 경고다. 현재 미국 연방금리는 0.25~0.5%다. 블룸버그가 집계한 다음달 미국 기준금리 인상 확률은 94%(17일 현재)다. 골드먼삭스의 전망이 맞다면, 한 번에 0.25%포인트씩만 올린다고 해도 내년 말이면 1.25~1.5%가 된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전세계 총부채는 지난해 말 기준 152조 달러(약 17경8800조원)다. 이 중 100조 달러가량이 민간 부채다. IMF는 “민간 부채 비율이 연 1%포인트 오를 때마다 금융위기 발생 확률은 0.4%포인트씩 높아진다”고 경고했다. 여기에 금리까지 오르면 여기저기서 부채 뇌관이 터질 수 있다. 이른바 ‘빚의 복수’다. 중국 민간부채가 도화선이 될 수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의 신용갭(GDP 대비 신용비율) 기준으로 중국 민간부채는 이미 ‘위험’ 수준을 넘었다. 경제분석기관인 롬바르드는 최근 보고서에서 “중국 부채 폭탄이 터지면 세계 교역이 움츠러들고 투자도 위축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의 가계부채 리스크도 더 고조될 수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대출금리가 0.25%포인트 오르면 국내 가계의 이자 부담은 약 2조원 증가한다. 또한 금리가 1% 오르면 가처분소득 대비 원리금상환 비율이 40%를 초과하는 한계가구가 10만 가구 증가한다. 김영준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미국의 금리인상으로 글로벌 자금이 유출되고 국내 금리도 상승세로 돌아설 경우 가계의 이자 비용 증가를 초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는 내년에도 세계경제를 불확실성의 울타리에 가둘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상황이 더 꼬였다. 영국 정부가 브렉시트 계획을 수립하지 못했다는 내용을 담은 문건이 폭로됐고, 영국 대법원의 브렌디 헤일 판사는 “브렉시트 절차는 2019년이나 돼야 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영국 대법원은 ‘브렉시트 결정에 의회의 승인이 필요한가’를 놓고 12월 초 심리에 착수해 내년 1월 중 최종 선고를 내릴 예정이다. 영국 정부는 내년 3월 초 EU와 협상을 시작할 방침인데, 법원 판결에 따라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재투표 가능성도 거론된다. 테리사 메이 총리는 “두 번째 국민투표는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지만, 최근 영국에서 재투표 여론이 일고 있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최근 방송에 출연해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선 후 브렉시트를 재고해 볼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올 4분기와 내년 초 영국의 경제 지표 결과도 브렉시트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영국 경제는 브렉시트 결정 이후 오히려 좋아졌다. 3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3%로 시장 예상치(2.1%)를 웃돌았다. 실업률은 4.8%로 2005년 3분기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투표 직후 6000대가 무너졌던 FTSE100 지수는 10월 중순 7000포인트를 넘었고, 최근에는 6700~6900 사이에서 움직인다. 일각에서 “브렉시트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과장된 것 아니냐”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 국제통화기금은 지난 10월 전망 보고서에서 올해 영국 경제성장률을 7월 전망보다 상향 조정(1.7%→1.8%)했다. 그러나 내년 성장률은 낮춰 잡았다. 브렉시트가 올해보다 내년에 미치는 영향이 더욱 클 것이라는 뜻이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최근 보고서에서 “브렉시트 협상이 시작되면 영국은 더 분열할 것이고 정부 내부의 갈등도 드러날 것”이라며 “이로 인해 투자자와 기업, 소비자는 초조해지고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경제를 더 약하게 만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구 전체가 실패한 정치 체제에 등을 돌리고 있다.”


영국의 극우정당인 영국독립당(UKP) 전 대표 나이젤 파라지의 말이다. 이 말이 내년 유럽에서 또다시 확인될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요즘 유럽 전역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극우정당의 득세다. 이들은 ‘반체제적 분노(anti-establishment anger)’에 기댄 포퓰리즘 전략을 펼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게 유권자에게 먹히고 있다. 내년 치러지는 네덜란드 총선(4월), 프랑스 대선(4월), 독일 총선(10월) 등에서 반EU, 반이민을 주창하는 극우정당이 승리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무디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EU 내에 정치적 불화와 분열 위험성이 커졌다”며 “보호주의와 고립주의를 지향하는 추세가 강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 정치권은 내년 시진핑 재집권을 앞두고 권력 투쟁 조짐이 보인다. 확고한 1인 체제를 구축하려는 시진핑 국가주석 세력(공산주의청년단)과 이를 견제하려는 태자당(원로 혁명 자제 그룹)·상하이방(상하이 출신 인맥)의 갈등이 경제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중국은 내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9월 19기 당대회, 11월 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19기 1중전회)를 잇따라 연다. 시진핑 집권 2기의 그림이 이 행사들을 통해 정해진다. 리커창 총리의 실각설이 불거지면서 중국 경제정책이 어떻게 바뀔지도 주목해야 한다. 통화 완화와 소비 진작에 중점을 둔 리커창 경제정책이 국유기업 개혁, 과잉생산 업종 구조조정, 부동산 거품 억제 등으로 바뀔 수 있다.


가장 큰 걱정은 한국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 거부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형국이다. 산적한 경제 현안을 풀어갈 컨트롤타워 부재로 한국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 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는’ 상황도 우려된다. 관료들이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놔도 대통령 입을 거치면 신뢰를 잃고 폐기될 수 있다는 얘기다.  

“다음번 경기 침체와 맞서 싸울 새로운 도구가 추가돼야 한다.”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이 8월 말 잭슨홀 미팅에서 한 말이다. 옐런뿐 아니라 전세계 중앙은행장들의 고민이 이 한 마디에 녹아있다. 달리 말하면, “지금은 다음번 침체와 맞서 싸울 도구가 없다”는 자백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년 세계 경제는 이른바 ‘정책 소진(Poilcy Exhaustion)’ 또는 ‘정책 절벽(Policy Cliff)’에 맞닥뜨릴 가능성이 크다.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이제는 재정이 나설 때”라고 한목소리를 내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요국 중앙은행은 비전통적 양적완화(QE)와 제로금리, 마이너스 금리 카드 등을 총동원했지만 경기 부양 효과는 미미했다. 그러다 보니, 요즘 중앙은행맨들은 더 새로운 정책을 개발하기 위해 실험실의 괴짜 연구원처럼 행세한다. 일본은행(BOJ)은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에서 단 한 번 쓰였던 ‘장단기 금리조정’ 카드를 꺼냈다. 연준은 직접 정부나 가계에 돈을 뿌리는 헬리콥터 머니와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높이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러나 마른 수건을 억지로 짜다 보면 찢어질 수 있다. FT의 칼럼니스트인 마틴 울프는 “현재보다 더 실험적인 조치를 취하면 심각한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눈길은 재정 쪽으로 모인다. 내년 각국 정부는 “재정 지출을 늘려라”는 압박에 시달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성적자에 시달리는 미국이나 경기 회복이 더딘 유럽·일본의 재정 여력을 감안하면 큰 기대는 힘들다. 한국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난 10월 유일호 경제부총리와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사이에 오간 신경전이 좋은 예다. 당시 유 부총리는 “재정 정책은 쓸 만큼 다 썼다”고 했고, 이 총재는 “통화정책을 쓸 수 있는 여력은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서로에게 떠넘기는 뉘앙스였다. 이런 신경전을 내년에는 더 자주 목격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선 과정에서 포퓰리즘 공약이 남발하면서 그나마 남은 정책 여력을 소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신성환 한국금융연구원장은 “지금은 1300조에 달하는 부채를 짊어진 가계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금리인상에 촉각을 세워야 한다”며 “특히 미국 금리 인상 여파로 국내 금리가 급상승하지 않도록 방어하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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