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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적당히 살기도 힘든 지금의 세대에게 작은 위로가 됐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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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적 멀미증후군’을 가진 만복(심은경)은 하고픈것도, 되고픈 것도 없는 여고생이다. 어느날 그는 경보’라는 뜻밖의 관심사를 갖게 되고, 처음으로 ‘잘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다. 과연 만복은 경보로 최고가 될 수 있을까.

'걷기왕’ 백승화 감독

대부분의 청춘영화가 꿈이없던 소녀가 뒤늦게 자신의 진로를 찾고, 열정을 불태워 성공하는 이야기라면 ‘걷기왕’은 다르다. 만복은 특별한 능력을 발견하지도, 하루아침에 성격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그 대신 느리게 걸어가는 것이 틀린 게 아니라는 걸, 빨리 뛰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걸 보여 준다. 청춘에게 열정·패기·간절함만을 요구하는 요즘, 백승화(34) 감독이 ‘걷기왕’(10월 20일 개봉)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꿈이 없어도 괜찮아, 적당히 해도 돼”라는 작은 응원이다.

열정 없는 청춘에 대한 백승화 감독의 애정이 각별한 것 같다. 드러머로 활동한 인디 밴드의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반드시 크게 들을 것’(2010)에 이어, ‘걷기왕’에서도 하고 싶은 게 별로 없는 10대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두 영화가 일맥상통하는데.
 “‘반드시 크게 들을 것’에 등장하는 친구들이나 ‘걷기왕’의 만복은, 완성되지 않은 조금 부족한 인물이었다. 나는 어딘가 미숙하고 미끄러지기도 잘하는, 아직 다 여물지 않은 청춘을 좋아한다. 그래서 계속 청춘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며 백 감독의 10대 시절이 궁금해졌다. 만복과 비슷했나.
“나는 만복과 달리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진 학생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고, 성적대로 대학에 진학하려는 친구들을 보며 ‘왜 꿈도 없이 살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 보니 ‘10대에는 미래에 대한 확실한 꿈이 없을 수도있고, 그것이 잘못된 일도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더라. ‘걷기왕’은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끝없이 도전하고, 열정을 가져야 한다’는 나의 기존 생각에 반기를 드는 영화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보다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냐’라는 말이 더 공감 얻는 시대 아닌가. 기존 통념에 딴지를 거는 영화라 반가웠다.
“비단 학창 시절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사회에 나와서도 우리는 늘 열정과 패기를 요구받는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라고 생각했다. ‘적당히 살아가기도 힘든 세대에게 작은 위로가 됐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걷기’라는 일상적인 일을 ‘선천적 멀미증후군’과 ‘경보’라는 스포츠로 엮어 낸 점이 신선하더라.
“쓸데없는 것을 잘하는 주인공이 어쩌다 경쟁의 세계에 들어서면서 겪는 에피소드를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어디 가서 잘한다고 말하기 민망한 게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숨 쉬기와 걷기를 떠올렸다. 마침 경보라는 스포츠가 있으니 ‘걷기’에 초점을 맞췄고, ‘두 시간을 걸어서만 등하교한다’는 설정을 위해 자동차·오토바이·자전거·소 등 움직이는 모든 것을 탈 수 없는 선천적 멀미증후군을 추가했다.”
극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동화적이다.
 “리얼리티보다 판타지 동화 같은 영화가 되길바랐다. 소순이(안재홍·목소리 출연)가 내레이션하는 것도, 화자가 동화책을 읽어 주는 듯한 효과를 주기 위해서였다. 또한 오프닝에 로토스코핑(Rotoscoping·실사 영상에그림을 덧입혀 움직임을 표현하는 작업 방식) 애니메이션으로 만복의 등굣길을 표현한것, 공룡 CG(컴퓨터 그래픽)가 아닌 공룡탈이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저예산 영화고,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장르다 보니 원하는 톤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심은경이 캐스팅된 후 이 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다.
“시나리오 모니터링할 때부터 ‘만복 역에 심은경씨가 어울린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가 ‘써니’(2011, 강형철 감독)나 ‘수상한 그녀’(2014, 황동혁 감독)에서 보여 준 모습과 만복 캐릭터가 비슷한 면이 많아, 나도 은근히 ‘심은경씨가 만복 역을 맡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예산 영화인 데다, ‘과연 그처럼 검증된 배우가 이 영화에 출연하려 할까’ 하는 마음에 선뜻 시나리오를 전달하지 못했다. 그런데 심은경씨가 시나리오를 보더니, 바로 ‘하고 싶다’고 답해 왔다. 만복 캐릭터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 같더라. 독립영화에 참여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같고. 용기 있는 선택이라 생각했다. 저예산 영화에 한창 전성기인 배우가 출연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심은경씨의 선택이 좋은 선례로 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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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왕 촬영현장

심은경은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만복 그 자체더라.
“초반 시나리오에서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최대한 ‘심은경’이란 배우가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는 방향으로 맞추려했다. 심은경 본인과 만복이 닮은 지점들이 있기에, 그의 행동·말투·표정을 상상하며 캐릭터를 완성시켰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걷기왕’을 준비하던 시절이 ‘심은경 관찰기’를 완성해 가는 과정 같기도 하다(웃음).”
음악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중 타이타닉(1997, 제임스 캐머런 감독) 주제곡 ‘마이 하트 윌 고 온(My Heart will Go on)’의 리코더 연주는 어떻게 들어가게 된 건가.
“유튜브에서 어떤 남자가 리코더로 ‘타이타닉’ 주제곡을 연주하다 음 이탈하는 영상이 유명세를 탄 적 있다. 편집 과정에서 음악 가이드로 그 영상의 음악을 넣었는데 반응이 좋았다. 처음에는 저작권 없는 곡을 쓰려고 했는데, 다른 곡을 아무리 넣어 봐도 원하던 느낌이 안 나더라. 그래서 고민하다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마이 하트 윌 고 온’을 넣게 됐다. 많은 분들이 ?유튜브 영상 속 음악을 그대로 가져왔다?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를 위해 새로 연주한 것이다. 플루트 전공자가 연주했는데, 워낙 실력자이다 보니 음 이탈도 제대로 능숙하게 내더라. 큰 도움을 받았다.”
엔딩곡도 인상적이었다. ‘영화는 재미있게 보셨나요. 조심히 살펴 가세요. 가방·지갑·핸드폰 잘 챙기고, 우리 다음에 또다시 만나요’라는 가사가 기억에 남는다.
“처음엔 연주곡을 생각했는데, ‘심은경씨가 엔딩곡을 불렀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부터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가사 앞부분은 만복이 걸어가면서 보는 풍경과 심정을, 후반부엔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을 쓴 것이다. 극장을 나서던 관객이 ‘조심히 살펴가세요’라는 가사에 멈추더니 엔드 크레딧을 끝까지 보더라. 심은경씨가 워낙 귀엽게 잘불러 줬다. 그가 이 영화를 전체적으로 사랑스럽게 만든 것 같다.”
이 땅의 수많은 ‘만복’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GV(관객과의 대화) 때 어떤 선생님께서 ‘만복이 엎드려 자는 것을 보고 등짝을 때리고 싶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반성하게 됐다’고 말해 주셨다. 그리고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부족한 면을 강조하기보다, 더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주고 싶다’고 하더라. 그 말이 나에게도와 닿았다. 많은 ‘만복’들이 자신의 부족한 면을 남과 비교하며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복의 대사처럼 ‘조금 느려도 괜찮으니까’.”

이지영 기자 lee.jiyoung2@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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