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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돌풍 비결은 멜팅팟의 역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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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인종 다양성이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돌풍의 진앙지가 됐다.’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얘기다. 인종 다양성 확대는 전체 인구에서 히스패닉, 흑인, 아시아인 등 소수 인종의 비중이 늘어난 인구통계학적 변화를 뜻한다. 이들은 통상 민주당에 우호적이다. 전통적으로 민주당이 공화당보다 이민자들에 더 우호적인 정책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지지 소수 인종 늘어도
투표권이 없거나 투표율 낮아
다양성 강해진 지역 백인들 결집
오히려 트럼프에 유리하게 작용

하지만 늘어난 소수 인종이 투표권이 없거나 투표율이 낮은 대신 소수 인종 증가에 반감을 갖는 백인들이 불법 이민자 추방을 외치는 트럼프에게로 쏠린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인종 다양성의 역설이 작동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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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8일)용 일회용 스타벅스 컵. 100명 이상의 얼굴들이 하나의 선으로 그려졌다. 스타벅스는 화합을 상징한다고 했으나 공화당원들은 진보 상징인 초록색을 사용했다며 비판했다. [AP=뉴시스]

위스콘신주의 중소 카운티 아카디아는 지난 15년간의 인구통계학적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1990년대 말 2400명이던 인구는 2014년 3000명으로 늘었다. 그 사이 히스패닉 비중은 3%에서 35%로 증가했다. 초등학교의 히스패닉 아동 비율은 73%로 치솟았다. 15년전엔 히스패닉 아동은 찾아볼수 없었다. 카운티의 주산업인 낙농업 일자리의 3분의 1은 멕시코 출신 근로자가 차지했다. 카운티 중심가엔 히스패닉 상점들이 줄줄이 문을 열었다. 백인 주민은 고령화되고 줄긴 했지만, 여전히 다수다. 이들은 평생을 살아온 카운티 모습이 달라지고 있는 사실에 불만과 불안감을 느낀다. 어느새 깨어보니 주위를 소수인종들이 에워싸고 있다고 느끼는 식이다. 자신들의 세금 상당부분이 히스패닉을 위해 쓰이는 것도 못 마땅하다. 이를테면 급식 지원(무료나 할인)을 받는 학생 비율은 20%에서 65%로 늘었다. 대부분은 히스패닉계 아동이다.

미국 중서부의 쇠락한 제조업 지대인 러스트벨트에선 아카디아 같은 곳이 한둘이 아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회과학에서 흔히 쓰는 인종다양성 지표로 분석했다. 주민 두 사람을 무작위로 뽑았을 때 다른 인종이나 민족일 가능성을 측정하는 지표다. 이 지표가 15년 사이(2000~2015년)에 최소 두배 이상으로 늘어난 카운티가 244개, 이중 절반 이상이 아이오와·인디애나·일리노이·미네소타·위스콘신 등 중서부의 5개주에 몰려있다. 러스트벨트의 인구지도가 달라진 것이다. 오래전부터 인종의 용광로였던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등 동부와 서부 대도시에선 다양성 지표 수치는 높지만 지표의 변화는 거의 없다.

트럼프는 인종 다양성이 급격하게 증가한 지역에서 실제로 강세를 보였다. 트럼프는 공화당 경선에서 다양성 지수가 1.5배로 뛴 지역 가운데 80%를 석권했다. 백인 유권자들이 장벽을 쌓고 불법이민자를 강제추방하겠다는 트럼프의 과격한 주장에 호응한 것이다.

이들 지역의 유권자 결속도는 트럼프에게 유리하게 기울고 있다. 지역 전문가들은 많은 히스패닉 전입자들이 불법 이민이라고 진단한다. 이들은 투표권이 없다. 관련 통계가 있다. 아이오와주의 캐롤 카운티에선 지난해 민주당원 등록자가 0.2% 감소했다. 반면 공화당원은 8% 증가했다. 아이오와주의 39개 중대형 카운티에선 민주당원 등록자가 3% 늘 때 공화당원은 7% 증가했다.

이번 미국 대선은 유권자 가운데 소수인종 비율이 역대 가장 높은 선거다. 여론조사기관인 퓨리서치 센터는 오는 8일 선거일에 히스패닉·흑인·아시안 등 소수인종 유권자 비율이 31%에 달할 것으로 예상한다. 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를 배출한 2012년 대선(29%)보다 더 높다. 힐러리 클린턴은 인종 다양성의 혜택을 누릴 것이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백인 유권자 비중은 사상 최저지만, 그래도 69%(1억5600만명)다. 여전히 선거에서 백인 유권자 파워가 절대적이라는 얘기다. 이들이 어느 정도 트럼프 돌풍을 뒷받침하느냐가 선거의 방향을 가를 전망이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i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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