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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The New York Times

그래도 클린턴이 이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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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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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
NYT 칼럼니스트

힐러리 클린턴은 끔찍한 후보다. 대선 기간 내내 전문가들이 꾸준히 얘기해 오지 않았던가. 언론에서 이만큼 비웃음을 당한 정치인을 찾아보면 2000년 대선 당시 민주당 후보 앨 고어가 있다.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는 비판에서부터 개인 신상에 관련된 문제까지 매사 여론의 몰매를 맞았다.

클린턴 우세, 운 아닌 능력 덕
트럼프 아니었어도 승산 충분
위기상황서 침착함 최대 강점
트럼프 외에 공화당 인물 없어

그러나 생각해 보자. 신기하게도 클린턴은 민주당 경선에서 꽤 손쉽게 승리를 거두었다. 3회에 걸쳐 이어진 TV토론에서도 트럼프를 눌렀다. (미 연방수사국의 ‘e메일 스캔들’ 재조사 같은) 막판 변수가 있긴 하지만 8일로 다가온 대선에서도 승리가 점쳐진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늘 나오는 반응이 생각난다. “그냥 운이 좋았다”는 것이다. 공화당에서 트럼프 말고 다른 후보가 나왔다면 클린턴이 참패했을 것이란 뜻이다. 그러나 역발상을 해 볼 수도 있다. 혹시 클린턴에게 근본적인 저력이 있어 이기고 있는 것을 전문가들이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생각해 보자. 공화당이 트럼프 대신 대선에 내보낼 만한 인물이 있기는 있었나? 트럼프가 공화당 경선에서 이긴 이유는 공화당이 선거마다 이용해 왔던 ‘적대적 인종주의’를 노골적으로 부각해 지지층이 원하는 얘기를 들려줬기 때문이다. 다른 경선 후보들이 ‘도그 휘슬(개에게만 들리는 호루라기: 상황을 아는 사람에게만 뜻을 전할 수 있는 정치적 화법)’로 변죽만 울리는 동안 트럼프는 대놓고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놨다. 자연히 다른 후보들은 트럼프와의 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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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트럼프와 겨룬 공화당 후보들은 트럼프보다 더 트럼프 같았다. 경선 토론회에서 ‘무뇌아’처럼 굴었던 마르코 루비오를 생각해 보자. 그는 상대방이 말을 마치면 “소설은 이제 그만 쓰세요”란 말을 고장 난 레코드처럼 되풀이했다. 이로 인해 그는 토론을 끔찍하게 망쳤다. 루비오는 경선 도중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일부러 미국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트럼프의 막말과 전혀 다를 게 없는, 한심한 주장이었다. 루비오가 진심에서 그런 주장을 한 건 아니라고 봐주더라도 그의 진실성은 여전히 문제가 될 수 있다. 표를 얻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티가 너무 났기 때문이다.

루비오 말고도 공화당의 기성 정치인들은 이런 딜레마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공화당 후보들 가운데 진심으로 감세가 경제를 살리는 마법의 처방이고 기후변화는 거대한 사기극일 뿐이며 ‘이슬람 테러리즘’이라 외치면 테러집단 IS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는 이가 몇 명이나 될까? 그럼에도 이런 엉터리 논리를 믿는 척이라도 해야 공화당이란 조직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을 감추기 위해 쓴 가면 속에서 거짓이 비어져 나오는 건 당연하다.

루비오에 대해 말할 게 하나 더 있다. 트럼프의 유치한 공격조차 넘지 못하고 무너진 남자가 클린턴과 붙으면 이길 것이라 믿는 근거는 무엇인가? 2012년 9월 리비아 벵가지에서 터진 테러로 미국인 4명이 숨진 사건과 관련해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클린턴을 추궁하기 위해 11시간 동안 이어진 청문회에서도 클린턴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를 추궁하던 조사위원들이 바보로 보일 정도였다. 우리는 클린턴의 이런 저력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평론가들은 정치인을 찬양하고 싶을 때 제한된 이미지 가운데 하나를 찍어 적당히 맞추는 경향이 있다. 정치인은 ‘영웅적 지도자’나 ‘함께 맥주 한잔 하고픈 남자’ 아니면 ‘우렁찬 웅변가’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모범생 이미지에다 여성인 클린턴은 태생적으로 ‘보통 남자’가 될 수 없다. 위의 세 가지 유형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클린턴은 농담을 해도 썰렁한 내용이 워낙 많아 재치 면에서도 점수를 따기 어렵다.

그러나 세 차례의 TV토론에서 시청자 수천만 명 앞에 선 클린턴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트럼프의 공격을 받고서도 신기할 정도로 냉정했으며, 완벽하게 준비가 돼 있었다. 정치 현안들을 확실히 장악하고 전략적으로 대응한 점도 눈에 띄었다.

TV토론에서 힐러리가 보여준 능력은 그가 대통령으로서 직무를 수행할 때 상당한 강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 점을 반드시 짚고 싶다.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에서도 노련함과 침착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면 전통적 의미의 카리스마는 없더라도 스타가 될 자질을 충분히 갖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시청자들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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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클린턴은 공화당의 어떤 정치인도 따라오지 못할 장점을 갖고 있다. 중요하다고 믿는 이슈에 대한 진심과 자신이 제안한 해결책에 대한 신념이다.

물론 나도 안다. 클린턴은 차가운 욕망과 계산적 태도를 가진 여성이다. 우리는 그녀를 그렇게 바라봐야 한다. 그러나 그녀가 여성인권이나 인종차별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헌신과 열정이 느껴진다. 그녀는 공화당의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방식으로 진실하다. 그러니 클린턴이 우연히 이어진 행운으로 어부지리를 누리고 있다는 ‘소설’은 이제 그만 쓰자.

폴 크루그먼 NYT 칼럼니스트

◆원문은 중앙일보 전재계약 뉴욕타임스 10월 20일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