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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진흥과 여성의 품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지난 한해를 되돌아보니 나 같은 스포츠 문외한에게도 가장 기억할만한 일은 역시 아시안 게임이다.
아시안 게임이 한창 진행되고있을 무렵 나는 집안 조카로부터 믿을 수 없는 얘기를 들었다.
여고 1학년생인 나의 조카는 매일 상오 6시에 일어나서 도시락을 2,3개씩 싸들고 밤 11-12시까지 공부할 교과서·참고서·노트등 공부도구 일체를 챙겨들고 학교엘 다닌다.
매일 들고 다녀야할 짐이 너무 무거워서 가끔은 부모가 자동차를 태워주기도 한다지만무슨 대책을 세워야할 필요가 있다.
그 애 어머니가 보기에 얼마나 무거울까 안쓰럽기도 하고, 한창 자라는 나이에 어깨가 비뚤어질 것 같기도 하고, 등이 굽을 것 같기도 하고, 팔이 늘어날 것 같기도 해서 걱정한 나머지 자전거를 사서 짐을 싣고 타고 다니도록 하자고 했다고 한다.
내가 그 말을 듣고 『그러면되겠군. 그렇게 하지 그래. 자전거는 갈 타니』 물었다. 조카애는 『자전거는 갈 타지만·학교에서 못 타게하기 때문에 안 된다』 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얼른 나름대로 머리속에서 생각이 돌아가서 『하긴 서울시내 교통질서가 잘 안잡혀 있고 난폭운전도 많아 자동차가 다니는 거리를 보면 너무 위험하니까 학생들의 안전을 위하여 자전거를 못 타게 하겠지』 했다. 조카의 대담은 『그게 아니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그것 외에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아무런 합리적인 이유가 생각나지 않아서 다시 이유를 물었다.
조카아이의 대답인즉은 『학교에서 자전거 타는 것은 여성의 품위를 깎기 때문에 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한 쪽에서는 거국적으로 운동경기를 관전, 응원하며 열광하는 사람들이 한 쪽에서는 자전거를 타는 것이 여학생의 품위를 깎는 것이라고 가르치고있다니….
어찌 이런 엄청난 모순이 멀쩡하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믿을 수 없는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예컨대 아시안게임에서 당당히 싸운 여자사이클선수들은 다 여성의 품위가 땅바닥에 떨어진 사람들이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국민체육을 진흥한다, 여성체육을 진흥한다하는 말을 들으면 한심스럽다.
여학생들에게 자전거를 타면 품위가 깎인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여성체육을 따로 어떻게 진흥시킨단 밀인가. 나의 의문은 정말로 그들이 스포츠를 사람하고 있는가하는 점이다.
우리는 정신적·육체적 한계에 도전하여 피나는 극기의 훈련을 거치는 체육정신을 존경한다. 그것은 불굴의 인간정신이며 인간이 어느 만큼 더 높은 것, 더 빠른 것, 더 먼 곳까지이를수 있느냐를 재어보는 한 이정표가 되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에게 스포츠가 주는 가장 큰 의미는 정신적·육체적으로 건강한 국민을 양성하고 체육의 기본정신, 즉 페어플레이의 정신에 입각한 사회를 만드는 것에 있다.
우리는 수전노가 벌어 쌓은 동전을 밤새워 세듯이 금메달 갯수만 세고 앉아 황홀해 하는 것은 아닌지….세모에 떠오른 이런저런 생각은 무언가 자꾸 우리사회가 본말이 전도된, 비인간적인 방향으로 치닫고 있지 않나하는 느낌을 준다. 그런 기계적인 사고방식의 주된 희생자가 우리 여성이라면 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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