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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유미술서 설치까지, 목장갑의 무한 변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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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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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을 소재로 한 비디오 설치물 ‘무제’ 옆에 선 정경연 작가. 장르 틀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시도다.

손가락이 누런 목장갑이 다닥다닥 들러붙어 회오리를 이룬 정경이 노동자의 아우성 같다. 울긋불긋 반짝이는 장갑 더미는 은하수처럼 보인다. 정경연(61) 홍익대 미대 교수는 지난 40년간 면장갑을 캔버스 삼아 인생 공부를 해왔다. 미국 유학시절, 고생하는 딸을 생각해 손을 보호하라며 어머니가 보내준 목장갑이 그에겐 수행(修行)의 도반이 됐다. 정 교수는 지금도 몇십 년 전, 소포 뭉치에서 솟아나던 장갑의 형상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고국과 피붙이에 대한 그리움이 손을 타고 밀려오던 그 순간, ‘장갑의 재구성’이 그의 업이 되었다.

내일부터 현대화랑서 ‘정경연’전

“장갑이 손이잖아요. 수담(手談)이란 말도 있지만 몸에서 손이 하는 말이 좀 많은가요. 장갑을 염색을 하거나 채색을 해 말리고 찌고 다림질하고 붙이면서 손의 의미를 생각하죠. 명상하며 장갑을 만지면 단색조로 흐르고, 놀며 신나 꿰매면 무지개 색조가 떠요. 장갑에 손을 넣고 손등과 손바닥을 만지노라면 이런저런 단어가 떠오르죠. 악수, 수화(手話), 화해, 해원(解?), 이별… 무(無).”

2일부터 29일까지 서울 삼청로 현대화랑에서 열리는 ‘정경연 전’은 오로지 장갑을 소재로 창작의 먼길을 걸어온 작가의 뚝심 어린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작품에 들어갈 장갑을 짜주는 공장이 한때 네 군데였을 정도로 ‘장갑 작가’로 각인된 그의 이미지는 강력했다. 최연소 홍대 교수 임용, ‘미술기자상’ ‘석주미술상’ ‘이중섭 미술상’ 수상 등 그의 독특한 집념에 대한 평가가 이어졌다.

“작품에 ‘무제(無題)’라 한 것은 제목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무한한 제목’이라는 은유입니다. 보는 이 마음에 따라 상상해보라는 권유죠. ” 02-2287-3591. 

글·사진=정재숙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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