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비피랍 한일 개발 박종수씨 억류수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NPA 지역사령부로 향한 11월1일부터 5일까지 닷새간의 행군은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으로「독일병정」소리를 들어온 나에게조차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NPA들은 먼동이 트기도 전에 우리들을 깨워 그 지겨운, 그러나 거절할 수도 없는 밥과 소금으로 아침을 먹인뒤 새벽6시부터 행군을 시작했다.
식사 때와 짧은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는 밤12시까지 산을 탔다. 정말이지「강행군」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 강행군 기간 중 장대비는 더욱 기세를 떨쳤다.
큰 강에는 으례 대나무를 엮어 만든 뗏목이 있어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다.
NPA들은 가슴팍 정도의 깊이라면 옷을 입은 채로 건넜다.
얕은 시냇물에는 우리나라방죽에서 볼수 있는 거머리들이 득실거렸다.
하도 힘이 들어 하루는 NPA 인솔대장을 불러 이왕 강행군을 하려면 산세가 험해도 지름길로 가자고 큰 소리를 쳤다.
한 번은 방이 이슥해서 마을을 지나갈때 나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개가 소리높여 짓는 가운데 NPA들이 마을 길로 내려서자 주변 농가의 호롱불이 NPA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마치 순서라도 정한 듯 착착 꺼져나갔다.
한편 이 강행군 기간 중 관광지로 개발하면 인파가 끊이지 않을 것 같은 기막히게 아름다운 절경도 보았다.
또 행군을 하면서 우리를 괴롭힌 것은 가시가 박힌 선인장 숲과 키를 넘는 갈대숲이었다.
닷새간 강행군을 하면서 몇번 탈출하려고 생각도 해보았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한번은 NPA들이 곤히 잠에 떨어졌을 때가 있었다. 변소를 가도, 강물에 목욕을 가도 M16을 든 감시병이 따라 붙었으나 이날 밤만은 그도 참에 취해 있었다.
그러나 탈출은 머리에만 맴돌뿐 실행하지 못했다.
첫째,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혼자는 강을 건너기가 어려운데다 성공하려면 최소한 다섯시간은 NPA들이 추격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런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소변을 볼때도 거머리처럼 따라다니는 NPA에게 『야, 네가 그렇게 감시를 해도 도망가려면 갈 수있어, 그러나 내 동료들을 생각해서 그만두는거야』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건네자 NPA는 다소 곤혹스런 표정을 짓기도 했다.
닷새간의 강행군길에 우리는 드디어 NPA지역사령부가 있는 S지역에 도착했다.
사령부의 고급 간부인 듯한 자가 고생을 시켜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NPA들은 자기 담당구역이 있는듯 일정 지점까지만 우리들을 호송해 다른 부대까지 인도하곤 돌아갔다.
NPA 지역사령부지역에서도 1∼3km씩 수시로 옮겼다.
한 지역에서는 NPA들이 파를 심는 것을 보았는데 농촌출신인 내가 보기에는 파종 방법이 시원찮았다. 그래서 2백여알을 달라고 해서 내가 직접 심었다. 며칠 후 내가 심은 파는 파릇파릇하게 자라고 있으나 그들이 심은 것은 싹이 노래졌다.
그들은「미스터 박」의 파종 솜씨를 칭찬했으나 부대를 이동할 때 아직 자라지도 않은 파들을 몽땅 뽑아 먹어버렸다.
NPA 지역사령부 지역에서는 먹고 자는 일만이 계속됐다. 아침6시에 밥을 먹고 감시원의 감시하에 30∼40m반경 내에서 산책을 한 후에는 원두막 같은 집에 엎드려 있는 것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근처농가로 이동했을때 낡은 영어로 쓰인 구약성경해설서를 한권 얻었다. 나와 정계장은 둘다 종교가 없었으나 우리는 이 해설서를 4∼5차례나 통독했다.
그러던증 나와 정계장은 병명을 알수 없는 고열로 고생을 하게됐다.
12월1일부터 내가 먼저 고열이 나고 물조차 삼킬 수 없는 병이 시작됐고 3∼4일후 정계장이 같은 증세를 보였다. 다행히 나는 5일만에 회복했으나 정계장은 석방될때까지도 고열로 고생을 했다.
우리의 병이 심해지자 역시 NPA소속인 20대의 여의사 (?) 가 청진기와 체온계·혈압계를 가지고 와서 진찰을 한후 해열제로 보이는 약을 주었다.
NPA중에는 여자도 있었다. 대부분 평복차림인 그들은 큰 방에서 한꺼번에 남녀가 같이 잤으며 우리 옆에 여자NPA들이 자는 것이 관례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