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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대비 맞으며 칠흑 속 강행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그렇게도 먹고 싶었던 김치를 57일만에 대하고 보니 눈물이 콱 쏟아져 내렸다.
마닐라의 마가티 메디컬센터 4백14호실. 석방 첫 밤을 지내려고 침대에 누웠으나 좀처럼 잠이 오질 않는다.
침대 위에 누워 잔다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행복한 것인지 예전엔 상상조차 못했었다.
옆방 4백15호실에 누워있는 정상기 계장도 같은 생각이리라.
오랜만에 서울의 가족들과 재회 할 생각을 하니 눈시울이 뜨겁기도 하고 좋은 인생경험으로 돌리고 깨끗이 잊기로 굳게 작정했던 악몽의 57일이 자꾸 되살아나 나를 괴롭혔다.
지난 10월22일.
파살렝 한일개발 캠프4 숙소를 침범한 신인민군(NPA)의 애꾸눈 일행이 우리들을 인질로 선정(?)할 때만해도 2∼3일 있으면 물려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날 밤12시 우리를 인질로 끌어낸 NPA는 전위·중위·후위 등 부대를 3팀으로 나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정글 속으로 행군을 시작했다.
우리는 후위부대와 같이 따라갔는데 이는 정부군과의 총격전이 있을 경우 우리 외국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우기를 맞은 파살렝에는 이날 밤에도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NPA들은 새벽 6시까지 밤새 쉬지 않고 정글 속으로 행군을 계속했다.
우리 자신 이 지역에서 공사를 하고 있어 웬만하면 방향정도는 알 수 있을 법도 했지만 정말 동서남북도 분간할 수 없었다.
계속되는 폭우로 계곡의 물이 무릎까지 차 올랐으며 우기를 맞아 떨어져 쌓인 나뭇잎에 우리는 몇번씩 미끄러 넘어지고 뒹굴어야만했다.
어렸을 때 땔감나무를 지고 수십리 길을 걷고, 공군장교시절 산악을 오르내리던 나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지만 정 계장은 자주 미끄러지고 넘어지곤 했다. 우리는 서로 의지하며 일으켜 세우곤 했다.
새벽6시 A지역(NPA는 지명과 인명을 공개하지 말 것을 희망했으며 다른 한국인의 안전을 고려, 첫 글자만 표기)에 도착했을 때는 「독일병정」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였다.
나도 몹시 지쳐있었다.
이곳에서 우리일행은 통나무로 네 기둥을 세우고 나뭇잎으로 지붕을 만든 「집」에서 쌀부대를 엮어 통나무 기둥에 매단 새 둥우리 같은「침대」에서 NPA들이 준 얇은 담요를 덮고 잠을 자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긴장 속의 긴 행군으로 피로할 대로 피로한데다 옷까지 흠뻑 젖어 몹시 추웠다. 게다가 모기는 물론 열대 정글의 이름 모를 곤충들이 우리를 쉴 사이 없이 공격해왔다.
「침대」에 누웠으나 잠이 올 리가 없다. 비는 계속 억수같이 퍼부었으며 NPA감시병들이 우리 주위를 계속 순찰하고 있었다.
NPA는 아침이 되자 쌀밥과 생선통조림·소금 등으로 식사를 주었다. 필리핀 사람의 습관대로 손으로 밥을 먹던 그들은 우리 두 사람에게만은 포크를 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마닐라 시내에서도 필리핀 음식은 역겨워 먹지 못했는데 이 정글 속의 음식을 어떻게 먹겠는가?
그래도 NPA 들이먹는 반찬은 소금 한가지이나 다름없는 것을 보니 우리들에게는 제법 대접을 잘 해주는 것 같다.
우리는 이 첫 기지(A지역)에서 31일까지 머물다 11월1일 제2기지로 옮긴 것을 비롯해 석방될 때까지 무려 15번이나 기지이동을 했다.
정글 속의 밤은 13시간이나 계속된다.
하오 6시30분부터 어둠이 깔리면 별도 보기 힘든 밤이 상오 5시30분까지 계속된다.
그들은 우리에게 다른 주문이 없었다. 할 일도 없어서 먹고 자는 것이 일 이었으나 이 먹고 자는 문제가 얼마나 우리를 괴롭혔는지….
다행히 우리는 돈을 약1천3백페소(약6만원)쯤 가지고 있어서 우리는 NPA에게 돈을 줄 테니 통조림·담배·달걀·비스킷·토마토 소스 등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이들은 이를 거절하지 않았다.
NPA는 우리가 주문한 식품 등을 빠르면 3일, 늦으면 1주일 걸려 갖다 주곤 했다.
우리는 생 달걀을 밥에 얹고 소금을 넣어 비벼 먹기도 하고 한번은 닭도 사다가 먹은 적도 있다.
그러나 2∼3일이면 풀릴 줄 알았던 우리는 이곳에서 돈이 거의 떨어져 갈 때쯤인 11월1일 이 기지를 출발해 무려 5일간의 행군을 해야하는 B기지로 이동했다.
하루 8∼12시간씩 억수같은 비를 맞으며 정글을 행군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식품공급도 안되고 NPA가 주는 음식도 먹을 수 없어 추위와 허기에 시달렸다. 다행히 고사리와 고구마 줄거리를 구할 수 있어 도움이 됐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로 끌려가는 것일까? 가족들은 얼마나 걱정할까? 회사는 우리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고 있겠지 하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다행히 NPA는 우리를 친절히 대했으며 생명에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다.
행군을 하는 동안 감시역을 하는 NPA에게 『도대체 왜 우리를 납치해 가는가』고 물었으나 『잡아오라는 「상부의 명령」을 집행했을 뿐 이유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무서운 정치적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불안한 생각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박종수 86·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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