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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대의 지성과 산책] 최재천 “개도 개성 뚜렷하고 아픔 공감…8마리 키우며 실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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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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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생태원에는 최재천 원장이 즐겨 찾는 산책길이 두 곳 있다. 다윈의 길, 제인 구달 길. 영장류 연구가 제인 구달(82) 박사가 2014년 방문해 새긴 동판이 보인다.

그와 동물 얘기를 하면 인간이 잘 보인다. 시인을 꿈꿨던 자연과학자 최재천(62). 그는 8마리의 개와 함께 살고 있다. 개미·까치·원숭이·돌고래에 이어 새로운 연구에 돌입한 것은 아직 아니다. 외동아들과 부인이 좋아해 키우고 있다지만 8마리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렇게 산 지 10년이 넘었다. “우리 집은 개판입니다. 8마리의 개와 그들을 시중드는 2명의 하인이 살고 있죠.” 농담처럼 던졌지만 사회생물학자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자연과학자·국립생태원장
엄마개 나가면 1마리가 동생 보살펴
못 움직이는 개에겐 놀잇감도 줘
과학·수학 힘드니까 좀 안 하게 하자?
이럴 거면 문·이과 통합 교육 반대

그는 예언에 능하다. 호주제 폐지, 문과·이과 통합, 고령화 사회와 인생 이모작 등 그가 주장한 일들은 대개 현실이 됐다. 반려동물도 그중 하나다. 개 연구가 본격 진행된다면 세계적인 성과가 그의 집에서 나올지도 모른다. 물론 희소식이겠지만 그 결과는 인류에게 그다지 좋은 소식은 못될 것 같다. ‘개만도 못한 사람’이란 옛말이 과장은 아닐 것 같은 ‘불길한 예감’. 개의 인지·공감 능력 연구가 세계 동물학계의 핫 트렌드라고 하는데 다른 개의 아픔에 공감하는 개의 능력이 입증될 수 있겠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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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길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직을 휴직하고 충남 서천 국립생태원 초대원장을 맡은 지 3년이 거의 다 됐다. 세계 규모의 개미 특별전, 자연을 좋아한 화가 장욱진 전시 등이 열리는 국립생태원에서 그를 만났다. 문과·이과 통합교육을 15년 전부터 강조해 온 그가 내년 실시를 앞두고 의외의 발언을 했다. “이럴 바에는 통합하지 않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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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생태원 초대원장 3년 기한이 다가오는데.
“그만두려 한다. 어쩌다가 일찌감치 석좌교수가 됐는데 이화여대에서 더 이상 자리를 비울 수 없을 것 같다. 집에서 개도 8마리나 기르고 있는데 더 한다면 미친 거다. 아내가 지방대 교수 할 때 외동아들을 길러 보고 싶다 해서 닥스훈트 한 마리를 기르기 시작했는데 새끼를 치며 대가족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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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과 함께하는 최재천 원장. [일러스트 박근용]

새로운 연구 과제인가.
“사실 최근 학계에서 가장 많이 이뤄지는 게 개 연구다. 그런데 하버드대 연구소에 가 봐도 기껏해야 몇 마리 연구한다. 한 종으로 8마리이고, 다 유전적으로 한집안이고 하니 상당히 해 볼 만한 세팅을 한 것이다. 그런데 안사람이 그런 눈치를 채고 얘네들 연구하지 말고 지극히 자유롭게 하자고 한다. 개 관리는 전적으로 안사람 몫이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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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만의 특별한 모습이 발견되나.
“동물 인지 연구에서 키워드 중 하나가 개성이다. 옛날 같으면 동물의 개성 그러면 그야말로 개가 웃는 얘기였다. 무슨 퍼스낼리티(personality·개성)냐, 개에게 퍼슨(person·개인)이 있느냐, 이랬다. 그런데 최근 ‘진딧물의 개성’에 관한 논문이 나왔다. 또 하나는 동물의 공감 능력 연구다. 영어로는 엠퍼시(empathy). 남을 이해하는 능력, 동물에게 그게 있다는 게 밝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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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8마리에도 개성이 보이나.
“8마리가 다 다르다. 개성이 충만하다. 지금 엄마 개와 자식 7마리가 살고 있는데 공주라는 암컷은 정말 독특하다. 엄마가 어디 가면 동생들을 끌어안고 보살펴 준다.”
구체적으로 발견되는 게 있나.
“ 강아지 한 마리가 디스크라서 못 걸었는데 그 녀석이 집안에서 조약돌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일하는 분 얘기가 공주가 물어다 줬다고 하더라. 폐쇄회로TV(CCTV)를 설치해 보면 좋겠는데 아내가 반대해 못하고 있다. 개가 그 정도 공감 능력을 갖는 것까지 밝혀진 적은 없는데 굉장한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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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여우

동물 사회에도 고령화 문제가 있나.
“현재까지 알고 있는 한 인간밖에 없다. 다른 모든 동물은 번식이 끝나면 서둘러 죽는다. 『인류의 기원』의 저자인 이상희 캘리포니아대(리버사이드 캠퍼스) 교수가 쓴 논문이 있다. 이미 5만 년 전에도 호모사피엔스에게서만 고령화가 있었다는 건데 결론은 ‘호모사피엔스는 고령화를 진화적 전략으로 택한 종’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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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전략을 택한 이유는.
“ 다른 동물들은 남의 새끼를 생각할 겨를이 없는데 인간은 젊은 사람의 아이를 나이 든 사람이 길러 주는 식으로 진화했다. 거기서 경쟁력이 생긴 거다. 인류 문명은 고령화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
앞장서 주장해 온 문·이과 통합교육이 내년에 실시될 예정인데 어떻게 보나.
“너무 늦었지만 해야 될 일이었다. 그런데 세부 내역을 보면 걱정스럽다. 이럴 거면 통합하지 않는 게 좋겠다.”
이제 와서 통합에 반대하는 건가.
“21세기가 과학의 세기이기 때문에 과학을 모르고 살 수 없으므로 통합하자는 거였다. 통합하자고 그래 놓고 과학이나 수학은 힘드니까 좀 안 해도 되게 하자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렇게 되면 그나마 몇 안 되는 이과생도 제대로 못 길러낸다. 거기서 무슨 국가경쟁력이 생겨나겠는가.”
앞으로 꼭 해 보고 싶은 일은.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게 진화생물학적인 생각이다. 먼 미래에 대한 생각은 없다. 가까운 미래 한 20년 정도는 우리 청년들을 위해 살고 싶다. 내가 대학 다닐 때보다 10배는 더 열심히 공부하는데 일할 곳이 없는 것은 문제다. 젊은이들이 신나게 일하고 즐기는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다.”

글·사진=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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