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박 대통령의 최순실 국기문란 해명, 납득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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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최순실 의혹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했다. 비선 실세라는 최순실씨에게 대통령의 연설문과 국무회의 발언 자료, 청와대 인사안 등이 유출됐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해명은 일방적이고 부실한 데다 상식 선에서 납득이 가지 않는다. 난마처럼 얽힌 국정이 수습되기는커녕 오히려 안갯속으로 빠져드는 모양새다.

커지는 의혹·비리 - 국정운영 시스템 붕괴
지금처럼 덮으려만 해선 국정정상화 어려워
이원종 비서실장 등 참모진 총 사퇴해야

 우선 박 대통령은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에 대해 의견을 들은 적도 있으나 청와대 및 보좌 체제가 완비된 이후엔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JTBC 보도에 따르면 최씨가 발표 하루 전 받아본 것으로 나타난 ‘드레스덴 선언’이 2014년 3월 28일의 일이다. 청와대 및 보좌 체제가 완비되는 데 1년도 더 걸렸다는 얘기다. 더 나아가 또 다른 보도에선 “최씨가 국정 전반을 논의하는 비선 모임을 운영했고, 모임 주제의 10%는 미르·K스포츠 재단 관련이지만 나머지 90%는 개성공단 폐쇄 등 정부 정책과 관련된 게 대부분이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두 재단이 설립된 건 불과 반년 남짓 전의 일이다. 정치권엔 ‘최씨의 청와대 인사안 사전 검토, 이권 개입설’이 파다한 실정이다. 야당은 “최순실 게이트가 아닌 ‘최순실 섭정 사태’”라며 “최순실이 권력 서열 1위”라고 규정하는 판이다.

 증언과 의혹이 사실이라면 심각한 정도를 넘어서는 국기 문란이다. 실정법 위반이고 정치적·법률적 책임이 박 대통령에게 돌아갈 수 있는 문제다. 아무런 공직이 없는 최씨가 국정에, 그것도 가장 내밀한 나랏일에 개입한 정황과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위를 좁혀 잡아 박 대통령이 인정한 청와대 문건이 통째로 유출됐다는 사실만 해도 헌정 사상 듣도 보도 못한 초유의 국정 농단이다. 대통령은 ‘순수한 마음에서 한 일’이라지만 최고의 국정 행위가 청와대 밖의 민간인 손에서 마무리 손질됐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최씨 등이 거론되는 박 대통령 주변의 비선 실세 미스터리와 잡음은 그동안 정치권에서 수없이 제기됐다. 하지만 그때마다 박 대통령은 “근거 없이 나라를 뒤흔드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최씨 측근이 얼마 전 “최씨가 유일하게 잘하는 게 대통령 연설문 수정하는 것”이라고 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만 해도 청와대는 “말이 되는 소리냐”며 펄쩍 뛰었다. 이원종 비서실장은 “정상적 사람이라면 믿을 사람이 있겠느냐.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가 어떻게 밖으로 회자되는지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이 실장마저 핵심에서 벗어나 겉돌았다는 사실도 드러난 셈이다.

 박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정직하고 상세하게 소명해야 한다. 최순실 문제는 이제 한 민간인의 부정비리 차원을 넘어섰다. 청와대의 국정운영 시스템이 무너졌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존립을 위협하는 중대한 도전이다. 박 대통령은 도대체 최씨와 어떤 관계이기에 최씨가 그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는지 국민 상식 선에서 납득할 수 있도록 밝혀야 한다. 대한민국은 대통령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숨은 권력이 먹혀 드는 그런 허술한 후진국이 아니다. 최씨를 비호한 청와대와 정부의 관계자가 누구인지, 이들이 결탁해 과연 어떤 국정농단을 한 것인지 빠짐 없이 드러내 보여야 한다. 결과적으로 거짓말을 한 이원종 비서실장과 대통령 주변 관리 책임이 있는 우병우 민정수석 등 청와대 참모진은 대통령 보좌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사퇴해야 한다.

 나라는 경제와 안보의 복합 위기다. 국가적 위기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위기 돌파를 위한 국정 최고책임자의 리더십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취임 후 최저점을 기록하며 무너져 내리고 있다. 온 나라가 최순실씨 가족의 권력형 비리 의혹으로 들끓고 있는데도 상식 선에서 납득시키지 못하는 것은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다. 위기인데 위기감을 못 느끼는 게 진짜 큰 위기다. 오직 진실만이 신뢰를 만들고 신뢰가 생겨야 위기를 돌파할 에너지가 모아진다. 분노하는 국민 앞에서 짤막한 입장만 발표한 뒤 질의응답조차 받지 않으면서 국론 결집과 국민 단합, 초당적 국정협조를 요청하는 건 이해할 수 없다. 박 대통령은 이젠 결심해야 한다.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