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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모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어떻든 폭풍 전야를 방불케 하던 「11월의 마지막 주말」은 지나갔다. 신민당 서울대회 장소였던 구 서울 고 자리에 포진했던 전경병력은 철수했고 지하철과 시내버스들도 이제 정상운행을 하고 있다.
서울 곳곳에서 부분적인 충돌사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회자체는 불발로 끝났다. 경찰의 철두철미한 봉쇄 앞에 대회를 강행하려던 야당의 시도는 결과적으로 속수무책이 되고 말았다.
재야 세력과 운동권 학생들이 가세해서 빚어졌을지도 모를 불행한 사태를 예방했다는 측면만을 생각하면 안도 할만 하다.
그러나 공권력의 개입으로 대회를 무산시켰지만 그래서 해결 된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11월29일을 넘긴데 대해 여야는 각기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리고 있을 것이다. 정국주도를 위해 보다 유리한 고지를 계속 유지하게 되었다는 것이 집권 쪽의 평가라면 야당은 비록 대회는 열지 못했지만 직선제 개헌안에 대한 국민의 열망은 충분히 표출했다고 자위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쪽도 개운해하고 마음 편해 할 사람은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상황에서 이제부터의 정국은 한층 혼미 속을 헤매게 될 가능성은 커졌기 때문이다.
야당의 요구, 보이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건 그것이 정치문제인 이상 정치력을 통해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마 집권 쪽의 부담으로 남게될 것이다.
꾸준한 경제발전으로 고도산업 사회를 목전에 두고, 특히 국민의식 수준이 괄목할만하게 향상된 사회에서는 국민의 다양한 욕구가 있게 마련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점으로 요약된다. 수렴할 것은 수렴하고 소화할 것은 소화해서 국민의 욕구가 분출될 수 있는 물꼬를 터주는 것이 통치기술이며 정치력이다.
지금까지 우리 모두를 괴롭히고 있는 정치적 불안의 원인도 그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통치는 있되 정치는 없는 사회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데서 찾아진다.
요즘 모두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한 대치 상황은 여야 모두의 책임이다. 여야 어느 쪽에 더 책임이 있는가를 따져 보았자 부질없는 일이다.
국민들의 바람이란 정치가 국민의 다양한 요구를 수렴하는 구실을 제대로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재야를 앞세워 정권에 도전하려는 발상도, 정치적인 문제를 공권력을 통해 풀어보려는 생각도 바람직한 일일 수는 없다.
일거에 상대방을 일패도지 시킬 수도 없지만 설혹 그게 가능하다 해도 최후의 수단만은 절대로 유보해야 하는 게 정치인에 주어진 책무다. 작용이 있으면 반드시 반작용이 있고 물리적인 힘의 사용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역사가 교훈하고 있지 않은가.
폭풍이 지난 후 여야는 제각기 후유증 수습에 고심한다고 들린다. 여야대표 회담을 통해 돌파구를 모색한다고도 하고 어떤 경우 건 국회는 포기 않는다는게 야당의 입장이라고도 한다. 하도 여러 번 들은 말이라 솔직이 별다른 기대는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대화 말고 달리 묘방이 없으니 어쩌랴. 가장 중요한 것은 평상심의 회복이다. 극한대치로 아무 것도 이룩된 것이 없다면 이제야말로 스스럼없이 대화의 광장에 나서야 하며, 정치의 모양새부터 서둘러 갖추어야 한다. 국민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촉구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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