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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세금 딴 데 쓰지마” 서울도 ‘주민발의 13호’ 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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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이달 초 서울시가 ‘압구정 지구단위계획’을 내놓자 서울 강남구청이 즉각 반발했다. 압구정동 재건축 아파트 층수를 35층으로 묶고, 기존 24개 단지별 재건축 사업을 6개 지역으로 묶어 추진한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서울시는 “주거 환경, 교통 여건 등을 고려해 이 일대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라고 배경을 설명했지만 강남구는 “주민들의 재산권을 제약함에도 구와 사전협의조차 하지 않은 불통 행정의 표본”이라며 맞섰다.

1978년 미국 부유한 캘리포니아주
주민투표로 재산세 인상 상한 정해
압구정 재건축, 삼성동 GBC개발 등
‘세금 내는 만큼 혜택 달라’는 자치구
‘강북도 골고루’ 서울시와 잇단 마찰

이런 입장 차는 ‘지역 개발을 누가 주도하고, 재건축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인식 차에서 생긴다. 강남구 관계자는 “서울시가 시 주도로 개발해야 상업시설 변경에 따른 공공기여금을 챙길 수 있는데 거기에 욕심을 보이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서울 중구의 현재 재정자립도는 52% 수준이다. 2000년대 중반에는 재정자립도가 97%에 이르렀지만, 복지비 부담과 2008년 시행된 ‘서울시 재산세 공동과세 제도(각 구에서 걷은 재산세를 공동 배분하는 것)’ 이후 자체 사업에 쓸 수 있는 예산이 급격히 줄어들어서다. 이 때문에 하수관 교체 공사 등 관내 중점 사업들은 멈춰 섰다. 최창식 중구청장은 23일 “재산세 공동과세로 인해 예산이 부족해지면서 신규 사업은 시작조차 못한다”며 “적은 예산으로 진행하다 보니 개별 사업도 장기화돼 주민 불만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서울시와 강남 3구, 중구 등 ‘부자 자치구’ 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를 두고 한국판 ‘프로포지션 13(주민발의 13호)’ 현상이 본격화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우리 동네 돈이 다른 지역에 쓰이는 건 곤란하다’는 취지가 최근 서울시-자치구 간 갈등과 닮았다는 것이다.

정광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미국과 달리 성문법 중심인 우리나라 는 주민 발의로 재산세율 등을 고칠 순 없지만, ‘주민 대표성’을 가진 기초 지자체가 나서서 자기 지역의 개발 이익이 다른 지역에 쓰이는 걸 막는 현상이 잦아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삼성동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옛 한국전력 부지) 개발에 따른 공공기여금 1조7000억원의 사용처를 두고 지난해 서울시와 강남구가 갈등을 빚은 일도 한국판 ‘주민발의 13호’의 또 다른 예다. 시는 당초 공공기여금 중 일부를 송파구 잠실운동장 일대를 ‘국제교류복합지구’로 개발하는 데 쓰려 했지만, 강남구와 주민들은 “강남구 개발에서 나온 돈을 다른 지역에 쓰는 일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했다.

서울 서초구도 2012년 강남역 일대 침수 예방을 위해 1300억원의 예산이 드는 ‘강남역~한남대교 간 대심도(大深度)’ 터널 건설을 서울시에 요구했다. 하지만 서울시는 또 다른 수해 지역인 양천구 신월동에 먼저 대심도 터널 공사를 하기로 했다.

서울 중구는 물론 강남·서초·송파구 같은 자치구들은 서울시 재산세 공동과세 제도에 대해 불만이 많다. 지방세인 재산세의 50%를 서울시가 거둔 뒤 이를 25개 자치구에 똑같이 나눠주다 보니 지난해 강남구는 재산세 2184억원 중 1092억원을 서울시에 냈다가 373억원만 돌려받았다. 재산세 수입 2,3위 서초구(1388억원)와 송파구(1232억원)도 마찬가지다. 반면 강북·도봉구는 재산세 487억원을 거둬 243억원을 시에 냈는데 373억원을 받았다. 조은희 서초구청장은 “우리 구의 재정자립도는 25개 자치구 중 2위지만, 정작 실제 사업에 쓸 수 있는 재정력은 22위로 떨어진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하지만 강태웅 서울시 행정국장은 “서울이라는 생활권 전체를 고르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게 시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정광호 교수는 “재정력 차이가 벌어지는 건 엄연한 현실인 만큼 서울시 등 광역 지자체의 재정력을 우선적으로 강화해 광역 지자체가 기초 지자체를 도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프로포지션(proposition) 13(주민발의 13호)

1978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주민 투표를 통해 재산세의 상한선을 정한 법이다. 부동산 값이 얼마나 오르건 주민이 내야 하는 재산세 인상 폭은 연 2% 내로 묶였다. 증세에 대한 반감과 자신이 낸 세금이 다른 지역 공립학교 지원에 쓰이는 데 대한 거부감이 토대가 됐다. 선진국형 조세 저항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조한대·서준석 기자 cho.hand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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