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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돈이 실력이라서, 절망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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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수
JTBC 디지털뉴스룸 부장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2000년대 초였다. 하루는 지금은 고인이 된 정운영(1944~2005) 당시 중앙일보 논설위원과 식사를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같은 회사에서 근무해도 왠지 어려워 말 한번 걸어보지 못했는데 모처럼의 기회라 평소 스포츠부 배구 담당기자로서 궁금했던 걸 물었다. “정 위원님, 키가 그렇게 큰 데 혹시 학교 다닐 때 농구부나 배구부에 들어오라는 얘기를 들어보신 적 없나요.”

정 위원의 키는 1m90㎝에 가까웠다. 동석자들 얼굴 위로 ‘쟤는 뭐 저런 걸 물어보나’ 하는 표정이 읽혔다. 그런데 정 위원은 “내가 이 얘기 한번 하고 싶었는데”라고 운을 뗐다. “학교 다닐 때 운동부 들어오라고 해서 정말 많이 도망 다녔어요. 맞기도 좀 맞았고.” 만약 정 위원이 그때 운동을 시작했다면 대한민국 경제학계에는 손실이었겠으나 대한민국 체육사는 지금과 다르게 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중·고교 배구부 감독·코치들로부터 “어디어디에 키 2m 가까운 아이가 있어서 어떻게 어떻게 해서 데려다가 운동시켰다”는 무용담을 들은 적이 몇 번 있다. 우리가 열광했던 스포츠 스타 중에는 이렇게 운동을 시작한 경우가 꽤 있다. 농구나 배구는 말할 것도 없고 축구나 야구에서도 큰 키를 가진 선수는 선호 대상이다. 스포츠에서 큰 키처럼 좋은 체격 조건은 중요한 ‘실력’이다. 이런 사실은 애써 숨기거나 부정할 필요가 없고, 그러지도 않는다.

20세 여성 승마선수 정모씨가 있다. 고삐를 처음 잡은 건 4세 때지만 본격적인 승마선수의 길은 고교 2학년이던 2013년에 들어섰다. 성악가를 꿈꾸며 예술계 중학교를 다녔던 정씨는 선수 시작 1년여 만인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마장마술종합에서 단체전 금메달을 땄다. 금메달 덕분에 정씨는 체육특기생으로 명문대학에도 들어갔다.

모든 과정이 순탄했던 건 아니다. 그가 출전한 승마대회(2013년 4월 한국마사회컵)에서 판정 시비가 일었다. 경찰이 신속하게 움직여 심판 등 대회 관계자들을 조사했다. 이와 관련해 대한승마협회 안팎에서 뒷말이 나왔다. 이번엔 문화체육관광부가 나서 승마협회를 탈탈 털었다. 일부 구성원이 물갈이됐다. 그 과정에서 정씨는 ‘승마계 공주’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곱지 않은 시선이 정씨에게 쏠렸다. 정씨라고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본디 공주란 외롭다. 소셜 미디어에 글로 분노를 쏟아냈다. ‘…능력 없으면 너희 부모를 원망해. 있는 우리 부모 가지고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고. 돈도 실력이야…’. 이 글은 수많은 이들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애써 숨기거나 부정하려 했던 ‘실력’에 관한 진실을 말하고 있어서다.

부모가 ‘실력’이고, 돈이 ‘실력’이라는 걸 홧김에 ‘실력자’가 공개해버렸다. 아시안게임 금메달도, 탁월한 코너링도 진정한 ‘실력’을 감추기 위한 포장이란 의심은 타당하다. 그러고 보니 유전적 요인에 영향을 받는 큰 키도 어쩌면 ‘부모가 실력’이란 또 하나의 증거일지도.

장혜수 JTBC 디지털뉴스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