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가라사대~ 당’이 된 새누리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기사 이미지

서승욱
정치부 차장

동반 하락 중인 청와대와 당의 지지율, 본인들은 1997년 신한국당 9룡의 모습을 상상하지만 현실은 도토리 키재기 신세인 잠룡들, 이런 도토리들 때문에 “어느 줄에 서야 할지도 모르겠다”며 하소연하는 의원들, 당에 들어올지 언질조차 주지 않는 ‘뉴욕의 그분’만 바라봐야 하는 답답한 처지, 거야(巨野)에 밀리면 단식과 보이콧으로 대응하는 리더십, ‘최순실 의혹’이든 무엇이든 청와대는 절대 못 건드린다며 방패막이로 나서는 친박계 돌격대들, 마이크만 잡으면 대통령의 ‘업적’을 전달하기 바쁜 완장 찬 당직자들. 필자가 매일 여의도에서 접하는 새누리당의 현실이다.

일반인은 ‘저 당은 왜 맨날 저 모양일까’ 여기겠지만 새누리당이 늪에서 헤쳐 나오기 힘든 구조적인 원인도 있다. 청와대의 인기는 내리막길인데 당의 헤게모니는 청와대와 한 몸인 열성파 친박계가 쥐고 있다. 비박계도 문제다.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층 30%에 군침을 흘리는 잠룡들은 청와대와의 본격적인 차별화는 엄두도 못 낸다. 어설프게 차별화했다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청와대만 바라보는 콘크리트 골수파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당에 활력이 생길 리 없다. 자생적 에너지를 만들어낼 동력이 없으니 외부 변수만 바라보게 된다. 그런 새누리당을 따라다니는 오명이 ‘○○○가라사대~ 당’이다.

‘가라사대’는 ‘말씀하시되’란 뜻의 문어체 높임말이다.

지난달 뉴욕을 방문한 정진석 원내대표가 전했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가라사대 “내년 1월 중순 이전에 귀국하겠다”에 새누리당은 한바탕 요동을 쳤다. 발언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비상이 걸렸다. ‘반 총장의 예비 우군’으로 꼽혔던 친박계는 “왜 정진석이 우리랑 상의도 없이 앞장을 섰느냐”고 부글부글 댔다. 어차피 새누리당의 대선 시계는 ‘반 총장이 말씀하신 1월 중순’이 돼야 돌아갈 테니 ‘반기문 가라사대’의 위력은 확인된 셈이다. 또 다른 ‘반 총장 가라사대’를 전하기 위해 의원들이 줄 지어 뉴욕행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새누리당은 ‘JP 가라사대 당’이기도 하다. 충청권의 어르신인 김종필(JP) 전 총리가 대선에서 누구를 지지할지를 두고 “JP가 ~라고 말했다”를 전하기에 바쁜 의원들도 있다. 정 원내대표가 뉴욕의 반 총장에게 전했다는 JP의 구두 메시지가 진실인지를 두고 “내가 JP를 만났더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서 하고 다니는 X들이 있다’고 하시더라”고 정 원내대표를 헐뜯는 이들도 있다. 충청권 내부의 헤게모니 싸움을 ‘JP 가라사대’로 벌이는 꼴이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 파문도 가라사대 시리즈의 연장선상이다. 회고록의 사실 여부를 떠나 미르·K스포츠재단 의혹에 휘청대던 새누리당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수 있는 구멍을 ‘송민순 가라사대’에서 찾게 됐다. 이런 새누리당에도 기사회생의 봄이 올 수 있을까.

서승욱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