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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다 고맙다, 이제야 그걸 안 것 보니 난 지진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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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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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타 공인 이야기꾼 소설가 성석제씨. 새 소설집 『믜리도 괴리도 업시』를 냈다. 평론가 노태훈은 그를 야수 같은 ‘스토리텔링 애니멀’이라고 평했다. [사진 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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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차 이야기꾼 성석제(56)씨가 새 소설집 『믜리도 괴리도 업시』(문학동네·사진)를 펴냈다. ‘성석제는 이야기꾼’이라는 표현은 문단의 자명한 공리(公理) 같은 것이어서 어쩔 수 없이 활용했지만 2013년부터 쟁여둔 8편을 묶은 새 소설책은 이전 성씨 소설과 좀 다른 느낌이다. 전체적으로 농담이 줄어들고, 그래서 덜 웃기고, 작가의 심중은 더 깊어져 여운이 한층 뚜렷해진 것 같다.

3년간 쓴 작품 8편 묶어 출간
“요즘은 일·존재 자체에 관심 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처럼
내 글에 개인사의 흔적 박혀있다”

그때그때 수요(원고청탁)-공급(작가여력) 상황에 따라 파편적으로 발표한 단편들이겠지만 그것들의 배치, 작품 소재, 맨 마지막 ‘작가의 말’ 등이 힘을 합쳐, 하나의 커다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작가의 정교한 계산이 있지 않았나 하는 인상을 풍긴다.

그런 메시지 후보는 아무래도 ‘현실’의 등장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과거 소설이라고 현실이 없었을까. 적어도 남북 이념대립의 가파른 고래 싸움에 인생이 송두리째 결단난 새우 같은 납북어부를 다룬 ‘매달리다’ 같은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발자크의 소설에서 제목을 따 ‘고전 코스프레’를 시도한 ‘골짜기의 백합’은 몸뚱이 하나로 한·일 화류 진창을 전전하다 카지노 백반집 주인으로 전락한 여인 이소동의 일대기를 그린 세태물(이 역시 이전에 잘 볼 수 없던 종류다).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한자락을 제목으로 인용한 ‘믜리도 괴리도 업시(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다는 뜻)’는 동성애가 소재다. 그러니 거칠겠지만 이렇게 얘기해볼 수도 있겠다. ‘황만근’으로 대표되는 기묘한 인물 수집에 열중하던 성석제의 소설 인간학에 현실, 보다 구체적으로 역사와 사회가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2012년 장편 『위풍당당』의 독일 출간에 맞춰' 출국하기 전날인 18일 성씨를 만났다.

예전 인터뷰 때 성실히 답변 안 한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몇 가지 묻겠다.
“무슨 소리. 열심히 답할란다.”
예전보다 ‘현실’과 ‘지금’이 더 많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소설의 서사성이나 이야기에 상대적으로 많이 치중했다면 요즘은 그냥 살아가는 일이나 존재 자체에 관심이 많이 간다. 남들은 애저녁(초저녁)부터 다 그렇게 해왔는데 나는 이제야 철 들었달까, 그쪽으로 한 걸음 옮아갔다고 해야 하나.”
역시 세월호 같은 사건의 영향인가.
“그러게. 갈수록 세태는 극단적으로 변하고, 세상의 불공평함 역시 극단적으로 확대되는 것 같다. 과거 같으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비극들, 주로 비극들이다, 희극은 점점 사라지는 것 같고, 어쨌든 비극들은 점점 잦아지는데 사람들은 자꾸 무뎌지다보니 그런 비극을 감각적, 감정적 이슈로 소비하다 또 다른 게 닥치면 그걸 소비하는 것 같고…. 하지만 그런 일은 작가에게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 집단적 비극이든 개인의 비극이든 소설은 그걸 다루기 마련이고. 남들은 다 하던 건데 난 지진아라 이제야 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번 소설집 ‘작가의 말’은 인상적이다. “인간은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랑의 산물이고 사랑을 연료로 작동하는 사랑의 기계이다. (…) 내게 서슴없이 다가와 나를 통과해가는 이야기들, 존재들, 삶이 고맙다. 사랑이, 미움이, 적멸이, 모두 다.”

거의 ‘모두 다 사랑하리’ 수준이다. 이번 소설이 특별히 더 애틋한 거냐고 묻자 성씨는 “쓰는 동안 꽤 힘들었던 것 같다”고 답했다. 소설에 개인사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다는 얘기다. 가령 과거엔 개인사라는 소설 자원을 조금만 떼어낸 후 많이 손을 대 키워서 썼다면 “지금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처럼 생체자원이 그냥 박혀 있는 게 보인다”고 했다. 소설에 대한 생각뿐 아니라 소설 쓰는 인간 자체도 변한다.

소설집의 핵심 메시지 후보는 마지막에 실린 짧은 작품 ‘나는 너다’에 들어 있다. 성씨는 2016년을 사는 평균치 한국인을 직장 다니는 41세 남성 ‘N’으로 설정한 후 그를 ‘너’라고 부르며 그의 척박한 생존 조건을 단편 전체인 8쪽에 걸쳐 상세히 나열한다. 한국이 자살률 OECD 1위라는 진부한 수치도 있지만 엄청난 가계부채를 구조적으로 갚을 수 없게 돼 있는데 누가, 왜 빚을 갚으려 하겠느냐는 절절한 대목도 있다. 그러더니 막판에 “너는 나다”라고 선언한다. 제목에 이은 확인사살. 확대하면 납북어부 이명길, 전직 창녀 이소동이 남 아닌 나, 그들이 그리는 소용돌이 한국사 전체가 내 얘기라는 얘기다.

물론 작가의 변신과 소설책 판매는 별개 .

요즘 시집은 그나마 괜찮은데 소설책은 안 팔린다는데.
“그럼 빨리 시집 내야겠네.”

성씨는 소설보다 8년 빠른 1986년 시로 먼저 등단했다. 시집도 두 권이나 냈다.

써놓은 게 있나.
“옛날에 써놓은 거라도…. 시집 잘 팔린다며.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야지.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데.”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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