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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같은 영화 본 것 맞나요, '아수라' 평이 왜 이렇게 아수라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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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CJ엔터 제공]

극과 극으로 엇갈린 영화 평 분석

“시간 가는 줄 ‘알고’ 봤다” “최고급 재료로 ‘비빔밥’이라니”(포털 사이트 네이버 관객 댓글). “한국 범죄·액션영화의 수작”(황진미 영화평론가) “(관객에게) 물리적 고통만 가중시킨다”(강유정 영화평론가). 9월 28일 개봉한 ‘아수라’(김성수 감독)를 향한 평은 이렇게 엇갈린다. ‘인천상륙작전’(7월 27일 개봉, 이재한 감독)을 두고 관객과 평단이 대립한 것과는 또 다른 양태다. SNS에선 스스로 ‘아수리언’이라 칭하는 ‘아수라’ 팬들이 등장하며 컬트 현상도 잇따랐다. 현재 관객 247만 명(10월 10일 집계 기준)을 돌파한 ‘아수라’의 엇갈린 평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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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테랑’ ‘내부자들’과는 다른 범죄영화

정우성·황정민·주지훈 등 스타 배우가 떼로 출연하는 누아르. 형사와 검사, 조직폭력배가 물고 뜯는 격전. 개봉하기 전 예상했던 ‘아수라’의 내용이다. TV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2006~, MBC)에 주요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총출동해 화기애애한 팀워크를 보여 준 뒤, 이 영화를 향한 기대감은 더욱 치솟았다. ‘범죄와의 전쟁:나쁜놈들 전성시대’(2012, 윤종빈 감독) ‘신세계’(2013, 박훈정 감독) ‘베테랑’(2015, 류승완 감독) ‘내부자들’(2015, 우민호 감독) 등 남성 범죄·액션영화의 계보를 잇는 영화를 기대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예상과 달랐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은 선하거나 덜 악한 주인공을 내세워, 그가 권력을 지닌 악에 맞서는 이야기로 통쾌함을 선사했다. 그런데 ‘아수라’가 집중하는 건 그런 카타르시스와는 거리가 멀다. 주인공 한도경(정우성)은 형사지만, 안남시장 박성배(황정민)의 심복으로 더러운 일을 도맡는다. 그는 박성배를 체포하려는 독종 검사 김차인(곽도원) 일당에 약점 잡혀, 박성배의 치부를 넘기라고 협박받는다. 양극단의 권력자에 희생당하며 자기보다 약한 인물을 괴롭혀야 하는 한도경의 스트레스가 극 전체를 아우른다.

‘아수라’에는 선한 인물도, 관객이 감정 이입할 만한 인물도 없다. 지옥에서 허우적대는 탐욕스런 인간들의 진흙탕 싸움만이 이어진다. 이 영화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관객 김지현(33)씨는 “사람들이 발 딛고 사는 현실도 피로한데, 이런 상황을 왜 극장에서 다시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동어 반복으로 보이는 구조 역시 지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는 “‘아수라’는 관객이 재미있게 보라고 만든 영화는 아니다”라고 운을 뗐다. 그는 “‘내부자들’ 등이 한국의 현실을 소재로 썼다면, ‘아수라’는 사회 구조의 본질을 파고든다”며 “재개발을 앞둔 안남시를 두고 돈과 성공을 좇는 인간들이 싸우다 괴멸한다. 탐욕의 노예가 모두 죽는 것, 이는 현실의 슬픈 은유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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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CJ엔터 제공]

2 폭력의 극치를 달리는 핏빛 전쟁터

“의도적으로 관객을 불편하고 힘들게 만들려 했다”는 김성수 감독의 말처럼, ‘아수라’는 피가 철철 흐르는 끔찍한 폭력과 살인의 아수라장으로 관객을 밀어 넣는다. 시장·검사·경찰 등 엘리트들이 모였지만, 여기에 두뇌 싸움 따위는 없다. 캐릭터들의 모든 행위는 오로지 폭력으로 시작해 폭력으로 끝난다. 132분의 상영 시간 내내 그저 때리고, 얻어맞고, 총 쏘고, 칼에 베이고, 협박하거나 겁박당한다. 극 중에선 상처 입은 얼굴들, 피가 튀고 살점이 날아다니는 모습이 계속 등장하고, 갖가지 욕설이 끊이지 않는다. “잔인한 것도 맥락이 있어야 하는데, 올해 최악이다. ‘아수라’는 그냥 변태적인 가학성으로 범벅된 영화”(포털 사이트 네이버 관객 댓글)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모든 행위가 폭력에 의한 것으로만 묘사되기 때문에, 뒤로 갈수록 더욱 잔인한 상황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라며 “목적을 잃은 폭력의 과잉은 보는 것 자체로 물리적 피로감을 가중시킨다”고 말했다. 반면 “잔인하다는 게 ‘아수라’의 약점이 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이지혜 영화저널리스트는 “장르 자체를 생각하면 ‘아수라’가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잔인한 영화는 아니다”라고 평했다. 이어 “‘아수라’는 누아르 장르인 데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영화다. 폭력성과 잔혹성이 따라오는 게 당연하다. 장르적 문법 안에서 잘 풀어냈다”고 덧붙였다.

3 훌륭한 연기 vs 어디서 본 듯한 캐릭터

정우성·황정민·주지훈·곽도원·정만식. 가히 ‘어벤져스급’이라 할 만한 캐스팅이다. 연기에 ‘구멍’이란 없는 이들이 만들어 내는 시너지는, 그 자체로 이 영화에서 빛을 발한다. 하지만 새로운 것은 없다. 각 배우가 기존에 맡았던 캐릭터의 모습이 수시로 겹친다. 악마 같은 황정민이나 악랄한 곽도원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정우성은 ‘비트’(1997)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의 내레이션부터 그렇다. 그래서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 연기는 훌륭하지만, 배우들이 기존 캐릭터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익명의 관객)는 평부터 “충분히 새로운 모습을 끄집어낼 수 있는 배우들인데 익숙한 모습만 보였다. 배우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이지혜 영화저널리스트)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다섯 배우가 한 화면에 등장하는 것만으로, 이 영화를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는 “고정적 이미지를 가진 배우들이 부딪치니, 캐릭터 간의 관계성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고 말했다. “남성적 이미지가 강한 개성 넘치는 배우들이 부딪혀 더욱 공격적 효과를 일으킨다. 극 중 풍경을 더욱 지옥같이 만드는 이미지들은 ‘아수라’와 딱 맞아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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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성 캐릭터가 나오긴 하나

‘아수라’의 주요 여성 캐릭터는 단 두 명. 한도경의 병든 아내 윤희(오연아)와 김차인 검사의 부하 직원 차승미(윤지혜)다. 윤희는 한도경이 박성배의 하수인이 된 결정적 이유이자 한도경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존재다. 차승미는 눈도 깜짝 않고 맥주병으로 한도경의 머리를 내려치는, 남성화된 여성이다. 둘 다 이 영화에서 큰 존재감을 발휘하는 인물은 아니다. 허남웅 영화저널리스트는 “아무리 ‘남자 영화’라 해도 여성이 이토록 배제돼야 했는지 의문”이라 꼬집었다. 이에 관해 황진미 영화평론가는 “‘아수라’는 여성에 크게 관심없어 보인다.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착취하는 장면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극 중 남성들은 자신이 남성임을 자랑스러워하거나 의리를 강조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즉 ‘아수라’의 남성들은 강자 앞에 빠른 속도로 무릎 꿇을 만큼 비굴하며, 병든 아내를 두고 다른 여성과 정사를 나눈 사실 때문에 수렁에 빠지는 수치스런 존재로 그려지는 것이다.

5 김성수 감독의 ‘작가 영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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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감독. [사진 CJ엔터 제공]

아수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끝까지 밀어붙였다”(magazine M 183호)는 김 감독의 말처럼 대중의 바람과 타협하지 않은 영화다. 스토리가 아닌 인물 관계에 몰두했고, 이를 여실히 보여 주듯 대부분의 대화 장면이 클로즈업 숏·리버스 숏으로 나타난다. 사운드에도 신경을 자극하는 소음을 삽입했다. 과한 시청각 표현과 이야기 구성 등 모든 요소가 숨 쉴 틈 없이 한도경의 피로감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듯하다. 이에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공감을 이끌어 내지 않고 혼자 내달리는 영화”라 평했다. 그는 “정서적 고통을 받더라도 관객이 주인공의 갈등에 몰입해야 하는데 그 부분에서 실패했다”고 덧붙였다. 반면 황진미 영화평론가는 “이 영화 전체에 흐르는 정서는 ‘환멸’”이라며 “피로한 감각은 주제와 꼭 들어맞는다”고 보았다.

결국 ‘아수라’는 ‘김 감독이 가장 하고 싶던 이야기와 표현 방식으로 빚은 영화’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관객을 의식하지 않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역설적으로 ‘A급 스타’를 캐스팅한 것이다. 허남웅 영화저널리스트는 “웃기다 울리는 ‘1000만 영화 공식’이 생긴 지금, 한 감독이 자신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담은 영화를 만든 것 자체를 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아수라’를 김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완성하는 영화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김 감독의 데뷔작 ‘런어웨이’(1995)와 ‘비트’에서도 자본의 욕망이 지배하는 도시의 뒷골목 이야기를 다룬다. 여기에서 낭만을 빼고 가혹한 현실을 덧댄 게 ‘아수라’다. 김 감독은 50대에 접어들어 더욱 독해진 마음으로 세상을 본 것 같다” (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아수리언’의 등장

요즘 SNS엔 스스로 자신을 ‘아수리언’ 혹은 ‘안남시민’이라 소개하는 사용자가 부쩍 늘었다. ‘아수라’ 팬임을 자처하고 이 영화에 대한 애정과 지지의 뜻을 적극 밝히는 이들이다. 처음으로 ‘아수리언’이라는 표현을 쓴 관객이자 인디 밴드 밤섬해적단의 멤버 권용만씨는 “깜짝 놀랄 정도로 잘 만든 영화였다”며 “정의로운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하는 식의 익숙한 이야기가 아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아수라’를 네 번이나 봤다”는 그는 “최근 한국 영화계에 불었던 범죄영화 붐이 낳은, 고급스런 폭력영화”라 덧붙였다.

하지만 트위터엔 “‘아수라’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이들 때문에 궁금해서 봤지만 아수리언은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어쩌면 ‘아수라’는 “어정쩡하지 않은 영화”(황진미 영화평론가)이기 때문에, 관객의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일부 매니어의 뜨거운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흥미로운 것은, ‘아수라’가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흔한(혹은 친근한) 서사의 틀을 벗어난 점에서 호평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껏 내가 원하던 결말이 이 영화에 다 있었다”는 한 트위터 이용자의 평처럼 말이다. 어쩌면 ‘아수라’에 대한 지지는 ‘뻔한’ 스토리텔링에 피로감을 느껴 온 관객의 자기 표현일지도 모른다. 관객은 지금 새로운 영화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이지영·김나현 기자 lee.jiyoung2@joongang.co.kr 사진=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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