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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식의 레츠 고 9988] 백남기 연명의료중단은 적법…뭘 그만둬도 되는진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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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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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백남기씨 주치의 서울대병원 백선하 교수는 11일 국정감사에서 “적절한 치료를 했으면 환자가 숨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적절한 치료는 혈액투석을 말한다. 대표적 연명의료 행위다. 가족의 요구에 따라 연명의료 중단을 했고 이로 인해 고인이 숨졌다는 것이다. 백 교수는 지난 3일 서울대병원·서울대의대 합동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위) 기자회견 때부터 이런 주장을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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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장이 나오자 싸움이 벌어졌다. 한쪽은 백 교수의 행위를 살인죄라고 비판한다. 다른 쪽에서는 백씨 가족에게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 ‘안락사 주범’ 멍에를 씌운다.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16개월 남아
일부 ‘부작위 살인죄’ 비난하지만
의학계 “사회적 기준 충족한 것”
혈액투석 등 4가지만 중단 가능에도
가족들 고통없는 처치도 중단 요구
새 계획서 양식 확립 전 혼란 양상

이런 혼란이 생긴 이유는 연명의료 중단의 법적 근거가 없어서다. 20년 논란 끝에 연명의료결정법이 올 초 국회를 통과했지만 시행은 1년4개월 후인 2018년 2월이다. 2년의 준비 기간을 뒀다. 물밑에 있던 혼란이 백씨 사건으로 불거졌다. 연명의료결정법은 2009년 5월 세브란스 김 할머니 대법원 판결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당시 유족들이 “어머니가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았다”며 인공호흡기를 떼달라고 요구했고 대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특위 위원장을 맡았던 서울대의대 법의학교실 이윤성 교수는 “아직 법이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그때까지 이 법이 사회적 기준이 된다고 봐야 한다”며 “이 법을 적용하면 백씨 연명의료 중단은 법적으로 문제될 게 없다”고 말했다. 백씨 가족의 뜻에 따라 백선하 교수가 두 차례 연명의료계획서(POLST)를 작성했고 이를 토대로 혈액투석을 하지 않았다. 연명의료결정법은 인공호흡기,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를 연명의료 행위로 정의한다.

가장 중요한 게 환자의 뜻인데, 이 역시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백씨는 지난해 11월 응급수술을 받았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뇌사에 가까운 지속적 식물인간 상태였다. 아내와 딸이 평소 고인이 “혈액투석과 심폐소생술을 원하지 않았다”고 확인했다. 연명의료결정법에는 ‘가족 2인 이상이 환자의 뜻에 대해 일치하는 진술을 하고 의사 2명이 확인하면 환자의 의사로 본다’고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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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의료 중단은 임종 과정 환자에게만 적용된다. 회생 가능성이 없고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돼 사망이 임박한 상태를 말한다. 백씨 같은 지속적 식물인간 상태는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백씨는 8월 말 패혈증(혈액 속에 세균이 침투에 염증을 일으킨 질병)이 재발하는 등 상태가 악화됐다.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허대석 교수는 “연명의료 중단 당시 환자 상태가 임종기에 접어든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다만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백선하 교수가 9월 6일 작성한 2차 연명의료계획서는 연명의료결정법과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가족들은 큰 고통이 따르지 않는 검사나 처치, 기타 행위를 원하지 않는다고 요청했고 이를 계획서에 담았다. 혈액검사·수혈, 혈압상승제·항생제 등의 투여가 그것이다. 연명의료결정법은 약물 중에서 항암제만 투여하지 않는다고 규정돼 있다. 서울대병원 측은 “우리 병원이 사용해온 연명의료계획서에는 혈액검사, 수혈 등도 중단 가능한 행위로 돼 있다”고 말했다. 새 연명의료계획서 양식이 나오지 않아서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어서 논란 소지가 있다.

서울대병원은 그런데도 2차 연명의료계획서의 내용과 달리 항생제 치료, 혈액 검사를 했다. 게다가 백 교수는 “연명의료 중단 때문에 혈액투석을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가족과 백 교수의 의견이 달랐다는 뜻이다. 이럴 경우 병원윤리위원회에 회부해 동료 심의를 받아야 하는데 그러질 않았다. 한국의료윤리학회의 한 임원은 “백 교수가 연명의료계획서에 혈액투석을 하지 않기로 본인이 서명해놓고 ‘혈액투석을 안 해서 숨졌다’고 주장하는 게 앞뒤가 안 맞는다”고 지적했다.

연명의료결정법 시행까지 이번 사건 같은 혼란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유상호 한양대 의대 의료인문학교실 교수는 “정부가 법 시행까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며 “최소한 병원별로라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황의수 복지부 생명윤리정책과장은 “가이드라인을 내 봤자 구속력이 없을 텐데 오히려 혼란을 부를 수 있다”고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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